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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은 꽤 감정이 풍부한 아이였다. 그러니까, 지구에 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웃고, 슬픈 일이 있으면 눈물을 흘렸다. 맛있는 것을 먹는 정도로 쉽게 행복해지고, 돈을 잃어버리는 정도로 쉽게 우울해하는 그런 아이였다. 남들과 다를 것 하나 없이 평범한.

어둠의 숲에 떨어진 후 최한은 생존을 위해 많은 것을 잃고, 버렸다. 무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름다운 하늘을 보아도 기쁨이나 행복을 느낄 수 없었고, 몬스터들에게서 도망쳐 살아남았음에도 제 신세를 한탄하며 슬퍼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닳고, 닳고, 닳아서, 그 닳아빠진 감정들 사이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절망, 괴로움, 분노, 추악한 질투와 일그러진 슬픔……. 하나같이 부정적인 감정들뿐이었다. 비극이다. 그 어떤 각본도 이렇게나 암담하고 처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한은 감정을 터트리지 않고 속에 가만히 눌러 간직해두었다. 늘 그런 상태였다.

 

 

최한은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가 바람에 나부낀다. 그곳에 그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었다. 노을을 품은 머리칼은 항상 따뜻한 빛깔로 반짝였지만, 지금만큼은 핏빛을 머금은 듯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케일의 몸에서 흘러나와 배인 피의 색깔로만 보였다.

 

며칠 전, 케일은 숨어있던 암의 잔당을 처리하던 도중에 무리하게 힘을 운용하다가 쓰러졌다. 라온과 최한이 다른 일을 받아 따로 행동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소식을 들은 그들은 하던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케일에게 돌아갔다. 케일은 무려 일주일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케일 님은.”

“…….”

“어째서 몸을 챙기지 않으시는 겁니까.”

“……괜찮다고 했잖아.”

 

케일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든 더는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최한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긴 정적이 이어졌다. 가라앉은 표정으로 케일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그는 몸을 돌렸다. 최한? 하고 부르는 소리에도 대답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방을 빠져나갔다. 어디로든 가버리고 싶었다. 케일은 따라오지 않았다.

 

*

 

한참을 걷던 최한은 옆에 있던 나무에 머리를 쿵, 박았다. 난처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던 케일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케일이 아슬아슬한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해서, 위험했던 순간에 지켜드리지 못해서,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함께 있지 못해서.

 

화가 났다. 케일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케일에게 화를 낼 상황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화가 났다. 제가 제일 가까운 곳에 있지 못해서 화가 났고,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화가 났다. 제게 명령을 한 케일조차 원망스러울 정도로 그냥, 세상의 모든 것에 화가 나는 듯했다. 속 깊은 곳이 끓어올랐다. 어둡게 침잠되어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스노우볼을 흔들어 수면에 흩어지는 가루처럼 떠올랐다. 안쪽에서부터 스멀스멀 번져 밖으로 드러났다. 이 분노는 정당하지 못하다.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냉정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케일 님이 또 쓰러지셨다는데 어떻게 냉정해져. 최한은 다시 한번 나무에 머리를 박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평생 케일에 한해서는 냉정해지지 못하겠지. 평소에 아픈 티를 내지 않고 늘 강인했던 사람이었기에 더 크게 와닿았다. 그만큼 괴로워하셨는데, 나는…….

왜 내게 말해주지 않으시는 거지. 왜 항상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는 거지. 나는 지켜져야 할 사람이 아니라 지키는 사람인데.

 

최한은 주르륵 미끄러지듯 나무 앞에 주저앉았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

 

둘의 사이는 이전부터 조금씩 삐걱대고 있었다. 최한은 참을성이 많고, 기본적으로는 유순했으며,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이외에는 대체로 얌전했다. 전부 케일 헤니투스가 함께한다는 전제였다. 케일은 지나치게 자주 무리를 했다. 그는 쓸데없는 설명을 덧붙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조금 더 우선시했다. 가장 강한 최한과 라온을 떼어놓고 행동하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나름대로 자신감의 표현이었지만, 그를 오래 본 자들은 알았다. 케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괜찮다고 이야기했고, 사실은 정말로 괜찮았음에도 그의 창백한 피부와 항상 위태로운 주변 상황 등으로 인해 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최한은 한결 어둡고, 부정적이고, 질척한 감정 속으로 침잠해갔다.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늘, 언제나 그랬다. 케일은 괜찮다고만 이야기했으니까. 최한은 케일의 '괜찮음'을 믿지 않았다.

 

*

 

그날부터 최한은 케일을 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케일의 뒤에서 호위했지만, 케일이 돌아보면 눈이 마주칠세라 고개를 숙였고, 케일이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그도 말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과묵한 둘이었지만 정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온과 홍, 라온도 눈치를 채고 둘이 함께 있는 자리는 슬금슬금 피할 정도였다. 분위기는 점점 파국으로 향했다. 론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든, 비크로스가 장갑을 겹쳐 끼든 최한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최한.”

“……네, 케일 님.”

“할 말 있으면 해. 분위기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짜증 섞인 목소리에 최한은 고개를 들어 케일을 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피했다. 불편하셨나요?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케일은 뒤를 돌아보았다.

 

“뭐?”

“불편하셨나요?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요.”

 

고개를 바닥으로 향한 채, 최한은 케일에게 묻고 있었다. 케일은 순간 그가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든 최한의 표정을 보고 인상을 썼다. 눈이 새카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케일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케일 헤니투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

“답답하신가요?”

“그러니까 말해보라는 거 아냐.”

“……저는 한동안 말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기묘한 말이었다. 그것은 통보이기도 했다. 반항기인가? 한참이나 최한을 바라보던 케일은 구겼던 인상을 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가. 마음대로 해라. 최한은 마음대로, 그의 뒤를 따랐다.

 

*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케일과 최한의 눈치를 보았다. 최한은 여전히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케일을 따라다닐 뿐이었다. 훈련을 하거나, 검을 휘두를 때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치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온과 홍, 라온이 말을 걸어보아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혹은 젓거나,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케일은 그를 묵인하고, 내버려 두었다. 이 대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답답해하는 것은 케일과 최한이 아닌 주변 사람들이었다.

 

“인간, 언제까지 최한이랑 싸울 건가?”

 

라온이 잔뜩 지친 목소리로 말하며 이불에 머리를 박았다. 케일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온과 홍도 맞는데, 그런데! 그만 좀 했으면 좋겠는데! 하며 조잘거렸다.

 

“지겹지도 않나? 나까지 속이 터지려고 한다!”

“맞는데! 신경 쓰여 죽겠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인간은 지금 이 분위기가 안 느껴지나!?”

 

인상을 잔뜩 구긴 라온이 답답하다는 듯 이불을 팡팡 걷어찼다. 홍은 그 옆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온은…… 어째서인지 한심하다는 눈으로 케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그 표정은? 케일은 눈을 치켜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따지고 보면 잘못한 것은 최한인데 혼나고 있는 것은 자신이다. 좀 억울하다 싶어 케일은 입을 열었다.

 

“싸운 적 없다. 최한이 일방적으로 화내고 간 거야. 난 잘못 없어.”

“잘못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하는데.”

“…….”

 

냉정한 온의 말에 잠깐 말문이 막혔으나, 케일은 반박했다. 진짜 잘못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없어. 애초에 최한이 뭐에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거든?”

“그걸 약한 인간이 모르면 누가 아나?”

“최한이 알겠지. 하여간 나는 모르는 일이야. 나한테 따져봤자 소용없다는 소리다.”

 

온과 홍, 라온은 잠깐 서로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온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더니 아예 침대에서 내려가 버렸다. 라온과 홍도 뒤를 따랐다. 아이들이 전부 나가고 방이 조용해지자, 케일은 스르륵 미끄러져 이불 속에 처박혔다.

단체로 몰려와 제 잘못이라 하니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생각나는 것이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 녀석치고는 드문 일이긴 했지.'

 

유달리 노을이 짙게 내리던 날, 표정조차 갈무리하지 못하고 왜 몸을 챙기지 않느냐 질책하던 그가 떠올랐다. 대답할 생각이 없어 입을 다물었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올 땐 언제고, 부르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했더랬다. 하지만 그때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는데. 마음에 걸리는 거라고는, 그 며칠 전에 쓰러졌던 것 정도였다.

그 일도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칼에 찔렸으니 대단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죽지는 않았으니 대단치 않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숨어있던 암의 잔당들은 꽤 머리가 좋았다. 케일이 최한과 라온을 보내도록 유도하고, 그 사이에 케일을 공격한 것이었다. 론과 비크로스가 함께 있었으나, 적이 생각보다 강했던 탓에 방패를 펼치기도 전에 가슴을 찔렸다.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심장의 활력 덕이었다. 케일이 오랜 기간 깨어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일행들에게는 어디를 다쳤다고 말하지 않고 적당히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말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 봐도 뻔했다.

혹시 칼에 찔렸다는 걸 알게 된 건가? 잠깐 고민했지만, 그것은 아닐 터였다. 론과 비크로스가 최한과 친하기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리 착한 최한이라도 참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대화를 해야겠군. 케일은 꾸물거리며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리고는 시종을 시켜 최한을 불러오게 했다.

 

 

*

 

똑똑.

 

케일이 문을 열자, 최한이 문 앞에 서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

“부르셨습니까, 정도는 하지그래.”

 

짧게 핀잔을 준 케일은 가만히 서있는 최한을 방 안으로 잡아끌었다. 최한은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여전히 말이 없는 채였다.

 

“앉아.”

“……네.”

“왜 불렀는지는 알겠나?”

“…….”

 

앉아서 멀뚱히 눈만 깜박이던 최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케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한은 눈치를 보는 것처럼 우물쭈물했다. 강아지 같군. 잠깐 그를 내려다보던 케일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다들 내게 와서 왜 너랑 싸우냐고 묻던데.”

“……그렇습니까.”

“아직도 할 말 없어?”

“…….”

 

케일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다가, 답지 않게 돌려 말하는 대신 직진하기로 했다.

 

“왜 화가 났는데?”

“……그건.”

 

갑작스러운 질문에 최한은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덤덤한 표정으로 케일과 눈을 마주쳤다.

 

“……제가 화났다는 것, 알고 계셨습니까?”

“티 나잖아.”

“그런가요…….”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당황스럽거든. 잘못한 것도 없는데 대뜸 화를 내고 있으니까.”

“…….”

 

최한이 입을 꾹 다물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것을 못 본 척하며 케일은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나는 거라고는 칼에 찔려서 쓰러진 것 정도인데, 그걸로 화를 낼 거였으면 진작에 냈겠지.”

“……칼이요?”

 

순간 변하는 최한의 표정에 케일은 멈칫했으나, 이미 입 밖으로 낸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케일은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아무튼,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맞나?”

“……아니라고 하면 아니고, 맞다고 하면 맞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케일 님이 쓰러지신 것도 이유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케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최한이 말을 덧붙였다.

 

“케일 님은 무리하면서도 늘 괜찮다고 말씀하시잖아요. 하지만 그런 케일 님을 보는 저희는,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케일 쪽에서 말문이 막혔다. 입만 벙긋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버렸다. 맞은편에서 최한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민망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아니요, 케일 님. 쓸데없지 않습니다.”

“…….”

“쓸데없지 않아요. 케일 님은 좀 더 쉬셔야 해요. 늘 무리해서 힘을 쓰고, 피를 토하고, 그러면서도 괜찮다고만 하시잖아요.”

“나는…….”

“……제가 의지 되지 않는 것은 알지만, 좀 더 저를 믿어주세요.”

 

케일은 고개를 돌려 최한을 마주 보았다. 최한이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어쩐지 부끄러워 보이기도 하고, 열망에 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주 간절해 보이기도 하고……. 케일은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새까맣고 반짝거리는, 마치 밤하늘을 잘라 담은 것 같은 눈이었다.

 

“너는 아직 어려, 최한.”

“케일 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려.”

“케일 님도 나이가 많지는 않으십니다.”

“꼬박꼬박 대꾸하지 마라.”

“하하.”

 

최한은 낮게 웃었다. 케일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최한을 바라보았다. 즐거워 보였다.

 

“케일 님.”

“……그래.”

“말해주세요.”

“뭘?”

“모든 것을요. 케일 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모든 것을 듣고 싶습니다.”

“……왜?”

“알고 싶으니까요.”

 

짤막한 대답에도 최한은 순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케일 님을 알고, 케일 님을 위해 살고 싶으니까요. 당신을 지키고 싶습니다.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지 않습니까.”

“…….”

“제가 화를 낸 건 전부 케일 님 때문이었습니다. 걱정되었으니까요.”

“……적당히 해.”

“케일 님을 위해서 화를 낸 거예요.”

“…….”

“저는 케일 님이 원하시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저는 그게 무엇이든 해낼 겁니다. 다만 케일 님을 위해 웃고, 울고, 슬퍼할 거예요. 당신만을 위해서 화를 낼 겁니다.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다. 가슴을 울리는 진실된 선언이었다. 세상에 그와 단둘이 남은 것처럼 사위가 조용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자신만을 위한 그 고백이 너무 무겁고 벅차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후회할 거다.”

“안 합니다.”

“네가 뭘 알아.”

“모르지만, 괜찮을 겁니다.”

“역시 그때 그냥 맞을 걸 그랬군.”

“네?”

“아니다.”

 

짧게 한숨을 쉬며 케일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었다. 저 녀석은 누굴 닮아서 이렇게 고집이 센 건지.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최한.”

“네, 케일 님.”

“화는 풀린 건가?”

“음…… 아니요.”

“뭐? 언제 풀리는데?”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케일 님…….”

“왜.”

“칼에 찔리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요.”

“……다른 얘기 할까.”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는 케일을 보며 최한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웃었다. 그 얼굴은 무척이나 앳되어 보여서, 케일은 그가 아직 17살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역시 어리구나. 아직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인데. 그럼에도 지키고 싶다고 하니, 케일로서는 별수 없는 일이다.

 

 

어느새 방 안에 노을이 드리우고 있었다. 최한은 소파에 기대앉은 케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 길을 잃고 헤매는 제 손을 잡아 이끌어준 사람. 저녁노을처럼 선명하고, 빛나는 사람.

케일은 늘 그를 구해주었다. 절망에서 건져내고, 가족을 만들어 주었다. 희망을 알려주었다. 신이 있다면 이런 모양일까.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는 이미 최한의 신이자, 빛이자, 태양이자 구원이었다. 그리고 최한은 그의 어둠이 되고 싶었다. 절망이자 괴로움, 분노와 질투와 슬픔이고 싶었다. 그를 위해 전부 짊어질 수 있었다.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바닥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온 절망으로부터 비롯된 어둠이 더는 강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케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다. 최한은, 앞으로도 영원히 케일만을 위해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할 것이다.

 

 

전부 말해주세요, 케일 님. 당신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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