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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케일 헤니투스, 그 이름은 전쟁이라는 시류를 타지 못했더라면 이미 진즉 바닥에 묻혔을 이름입니다. 귀족으로서의 섬세함이나 무가 일원으로서의 재능 중 그 무엇도 갖지 못한 이가 특출 난 운으로 세상을 평정하고자 하니, 이는 나라의 진정한 인재들을 향한 기만이라고 해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눈치 하나만큼은 참으로 빠르다곤 하나, 그야말로 그가 날만 세우는 들짐승과 비슷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 들짐승의 감을 가지고 온 세상을 휘젓는 것은 불길한 징조와 다를 바 없으므로, 하루빨리 멀리하심이 마땅해 보입니다. ]

 

“…신경 쓸 것 없어.”

책상 위에 턱, 두 다리를 얹어놓은 알베르가 고개를 저으며 허공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겉으로는 태연히 굴면서도 눈은 재빠르게 움직이며 힐끔, 서신을 손에 들고 있는 자의 눈치를 본 알베르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런 알베르의 불안한 심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공자는 태연한 낯으로 서신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저하야말로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가 그렇게 말할 줄은 반쯤 예상했고, 저렇게 말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그런 대답이 몹시 마음에도 안 들었다. 그의 앞에서는 제 마음이 제멋대로 튀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까지 겹쳐져 불쾌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알베르는 검지로 탁, 탁 허벅지 위를 불안하게 두드렸다.

“화도 안 나나? 불안한 정세가 끝나고 나니까 너를 다 늙어버린 사냥개처럼 버리라고 하는 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밀려오고 있는데도.”

그가 그런 말에 화를 내며 자신이나 나라에 등 돌리면 불리한 것은 자신임에도, 알베르는 반쯤 걱정이 섞인 말을 숨기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 그런 알베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한 번 어깨를 으쓱이고 말 뿐이었다.

“저하께서만 이 충신의 마음을 알아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정계에 나올 것도 아니니 알베르만 자신을 내치지 않으면 알아서 조용히 잘 살아가겠다는 말이었다. 그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면서도, 괜히 자신만 알아주면 된다는 말에 가슴이 뛰는 것은 알베르의 가슴이 이미 꽤나 고장나있는 탓이었다.

알베르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헤니투스가의 자랑이자 전쟁의 영웅, 이 시대의 별, 케일 공자를 내 감히 어찌 믿지 못하겠는가.”

“과연 저하의 안목이 높으시니, 이 나라의 미래가 밝습니다.”

그가 알베르의 미소를 따라 눈까지 휘어 접으며 밝게 웃어내는 것을 본 알베르는- 젠장, 속으로 욕을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번 장난을 치려다가도 한 번 웃는 것에 제 심장이 널뛰기를 하니 이제는 무엇을 해도 자신이 손해인 판국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직 연기력만큼은 그 실력을 다하지 않은 모양인지, 하하, 하고 꽤나 인자한 미소를 보이는 가증스러운 연기를 해보이자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됐고, 본론으로 넘어가기나 합시다. 왜 부르셨습니까?”

“상의할 게 있어서 불렀지. 자네가 멋대로 그 서신만 가져오지 않았어도 진즉 끝났을 이야기지만.”

“어떻게 가로챈 건지 우리 애들이 먼저 보고선 길길이 날뛰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저하께 가던 서신이니 그걸 그대로 애들이 갖도록 놔둘 수도 없잖아요?”

어떻게 가로챘긴. 알베르는 허, 숨을 내쉬었다. 그가 말하는 애들-그러니까 ‘애’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전쟁 영웅들-은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그를 몰아내려는 기미가 한 번 보였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이 서신의 주인공도 내일쯤이면 큰 봉변을 당했다고 연락이 올 것이 분명했다. 자신에게 오는 서신을 가로채는 것은 잘못하면 반역으로까지 몰릴 수도 있는데, 그걸 또 태연히 해내는 그의 사람들이나 그걸 또 순순히 인정하는 그나 참으로도 보통 배짱이 아니었다.

“뭐, 하여튼.”

하여간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쓸모없는 잔챙이의 안위 따위가 아닌지라 알베르는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다리를 슬그머니 내리고 허리를 쭉 펴 앉았다. 그리고 한 번 셔츠 깃을 정돈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고, 크흠 목소리까지 다듬는 알베르에 그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뭡니까?”

“케일 헤니투스.”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는 네, 하고 짧게도 답했다. 어서 말하라는 그 태도에 알베르는 속으로 혀를 차며 해야 할 말을 이어나갔다.

“본론만 말하지.”

“네.”

“사랑해.”

“…네?”

“사랑하게 되었다고.”

“누가 누구를요?”

“내가, 너를.”

“……이런 얘기를 하는 의도는 무엇이고요?”

“신중히 생각하고 답변을 주길 원하는 고백이지.”

“…….”

물론 알베르도, 자신의 고백이 꽤 이상하고 특이하다는 사실은 자각했다. 하지만 이 외에는 다른 고백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자신이야 수천 송이의 장미를 건네주고, 그의 손을 감싸며 잔뜩 기름칠 된 혀를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만, 그런다면 그는 잠시의 침묵도 없이 당장에 질린 표정을 하고 떠날 것이 분명했다.

후우…. 알베르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이렇게 덤덤히 말했다고 해서 고백을 하기가 쉽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었다. 심장이 자꾸만 쿵쿵쿵 뛰는 것을 억지로 누르고 눌러야만 평상시 같은 목소리가 나오는 지금, 머릿속에는 팽팽 도는 바람개비가 든 것처럼 어지럽기만 했다.

“당황스럽겠지만, 그래도 진심이야. 가볍게 하는 것도 아니고.”

“…….”

알베르는 웃음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암갈색 눈동자에서 당혹 외에 별다른 감정의 동요가 보이지 않는 것이 자신의 착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어 알베르는 초조함으로 입이 바짝 말랐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그가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셔야 하겠습니다.”

그것도 많이. 그 말을 뒤로하고, 그는 그대로 뒤돌아 자리를 떠나버렸다.

<2>

 

그 이후, 그에게 연락이 온 것은 꼬박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어디에서든지 상관없지만 밤에 보고 싶다는 말에, 알베르는 왕궁 내의 정원 중 가장 자신의 궁에서 가까운 정원을 비우고 그곳으로 그를 초대했다. 그의 연락을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시들시들 시들어가던 알베르는 그 기색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더 화려하게 치장을 한 상태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약속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정원에 도착한 알베르는 괜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가, 가장 꽃이 예쁘게 핀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가, 입구로 슬금 고개를 빼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산만한 정신으로 얼마의 시간을 보냈을까. 달이 가장 높게 뜬, 약속한 시간이 되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친.’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오늘따라 그의 얼굴은 더 아름다웠다. 아무리 하얗디하얀 달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알베르는 이제 달까지 원망하며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단정히 내려진 붉은 머리, 왜인지 조금 짙어진 색깔의 눈가와 달빛에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올라가는 입꼬리….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니.”

뻔뻔한 거짓말을 알 리가 없는 그는 그럼 다행이고요,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 차분한 발걸음을 알베르가 뒤따라가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왜 밤에 만나자고 했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 아닌가?”

“그런 이유라면, 사방이 막힌 방 대신 굳이 정원을 택하신 저하의 선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

정곡을 찔렸다. 조금이라도 더 낭만적인 공간에서 만나면, 거절의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을 계산한 탓에 정원을 택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마음을 들켰음에도, 알베르가 그저 부드러이 웃는 낯을 유지하자 그 얼굴을 힐끔 본 그가 자리에 멈추어 서고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에 관련된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

의외의 말에 알베르가 고개를 기울이자, 네, 하고 그가 말을 이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밤하늘을 신이 내려준 천막이라고 생각하더군요. 쉴 틈 없이 쐬어지는 빛을 감당하지 못한 인간을 위해 일정한 시간동안 신이 직접 천막을 둘러주고,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아침’이 되면 신이 그 천막을 거둬간다고 합니다. 별은 그 천막에 난 구멍들 사이로 들어오는 바깥의 빛이며, 별똥별은 바람에 천막자락이 펄럭이면 움직이는 구멍에 따라 보이는 현상이라고요.”

꽤나 예쁜 이야기긴 했으나, 고백의 답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알베르에게 있어서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 이야기였다. 알베르는 웃는 낯을 겨우 유지하며, “그래서?”하고 물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

알베르는 답을 하는 대신, 결국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음에도 당황하지 않는 기색으로 알베르의 손을 자연스레 가져갔다.

알베르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덮으며 조용히 웃는 그의 얼굴에서, 알베르는 어쩐지 싸함을 느끼고 말았다. 그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어가면서도, 알베르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여전히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서는 계획된 매정함의 냄새가 났다. 알베르는 가슴 속에 욱, 하고 차오르는 우울한 찌꺼기들을 애써 억누르기 위해 입을 열고 겨우 숨만 내쉬었다. 자신의 손을 덮은 온기가, 차가운 밤공기보다도 서늘했다.

그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그럼 낮이야말로 산지옥의 시간이구나.”

“…산지옥.”

“네, 산지옥 말입니다.”

그답지 않게도, 본론으로 들어가는 대신 말이 자꾸만 늘어지고 있었다. 알베르는 그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고, 휘둘리기만 하는 것은 알베르의 천성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알베르는 낮고 정확한 목소리로 케일 헤니투스,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손을 뒤집어 그의 손바닥을 꽉 쥐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알베르는 고백했고, 그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알베르는 자신의 불안이 말해주는 결과를 직감하고 있음에도 그 결과의 선고를 재촉하고만 싶었다. 자신의 그럴 수밖에 없는 심정을, 분명 그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신의 보호가 한 점 드리우지 않고, 매서운 빛이 온 땅을 비추며 안식 대신 근면만을 강조하는 시간.”

그는 그제야 고개를 하늘에서 돌렸다. 자신의 손을 꽉 잡은 알베르의 손을 힐끗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천천히 올라오는 시선이 알베르의 두 눈을 온전히 직시했다.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침을 느리게 삼켰다. 선고의 시간.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오직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만 모든 걸 개척해야하는… 자유라는 이름의 무거운 책임감만이 존재하는 지옥 말입니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

알베르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가, 그의 손을 놓아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이로군.”

“사랑을 나태라고 명명하는 이도 있더군요. 사랑은 사람을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에 속게 만들어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아무렇지도 않게 뒤에서 검을 뱃속 깊숙이 찌르니까요.”

알베르 크로스만.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알베르의 이름을 불렀다. 왜 거절을 고하는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나 달콤하게만 들리는지. 매혹당하는 동시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나태함이라는 짐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에게는 이 나라가, 당신이 해내야만 하는 목표가, 당신이 다스려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 같은 사람을 사랑해서 무얼 하겠단 얘기입니까.”

 

그 빛나는 산지옥에서 당당히 왕관을 쟁취하여 머리 위에 쓰고 있어야만 하는 당신이지 않습니까.

<3>

 

“…….”

침대에 누운 알베르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 그래. 자신은 방금 차였다. 네 선택이 그렇다면 존중하겠다는 말만 겨우 남긴 채 그와 헤어졌지. 멍하니 생각하며 이불로 몸을 칭칭 감싼 알베르는 휙 옆으로 돌아누웠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선 오래도록 신중히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고, 그런 그의 확고한 의지를 깨트릴 만한 어떠한 말도 당장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잠이나 자자. 이런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들을 망칠 수는 없었다. 당장 아침에 회의가 잡혀있었으며, 그를 시작으로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았지. 정세가 안정되었다고 해도 내부 사정은 다르니 더 꼼꼼히 신경써야할 때였다. 알베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저하, 괜찮으십니까?”

최측근이 그리 묻는 것에 ‘아니! 절대로, 아니!’라고 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알베르였지만, 숙달된 연기력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걱정하지 말고, 그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하나도 안 괜찮았다. 어젯밤 거절도 충격적이지만, 거기에다가 더해 고이다시피 온 바닥을 뒤덮어 꿈틀거리는 뱀들이 자신을 발끝에서부터 하나하나 삼켜버리는 악몽을 꾸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그 괴상한 감각이 남아 온몸을 맴도는 것에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까지 할 정도로, 끔찍한 꿈이었다. 덕분에 알베르의 상태는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보고 싶어….’

이렇게 자신의 고백이 망하고 말았으니 정말로 급박할 때만 그를 부를 수 있었다. 그는 워낙 벌인 일이 많으니 종종 자신에게 연락한다고 쳐도-물론 대부분 그 혼자서 해결하고 통보하겠지만-자신은 이제 그를 부를 일도 딱히 없을 게 뻔했다. 알베르는 당분간 그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머리를 쿵, 책상에 찧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이 안건은 그럼 남작의 제안대로 정리하는 것을 결론으로 하고, 이번 회의를 끝마치도록 하지.”

회의가 끝나자마자 알베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그가 생각나지 않도록 넘치는 일을 끝없이 소화해야지, 싶었다. 집무실로 가서 넘치는 서류들을 빠르게 정리할 생각을 하던 알베르를 누군가가 가로막기 전까지는.

“저하.”

‘……아직 멀쩡하네?’

그를 혹평하는 서신을 올렸던 귀족이었다. 어디 하나 다친 곳도 없어 보이고, 그 오만한 얼굴도 그대로인 걸 보니 아직 그의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아주 큰 것을 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네.’

얼마나 큰 것일까, 그걸 빌미로 그를 볼 수 있다면 상관이야 없는데. 여상히 생각하는 알베르의 의식의 흐름이 그의 사람들은 그를 자주 볼 수 있어서 좋겠다, 까지 흘러갈 때쯤 앞을 가로막은 귀족이 입을 열었다.

“서신은 보셨습니까?”

“……그래.”

알베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귀족은 마치 아주 엄숙한 것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탐욕스러운 눈빛은 숨기지 못한 자세로 입을 열심히 열었다.

“케일 헤니투스, 그를 경계하셔야만 합니다. 권력이라도 한 번 얻어보고자 왕세자 저하의 옆에 매일 같이 붙어있는 작자 아닙니까?”

‘매일 붙어있기는 무슨. 그러기라도 하면 내가 아주 환영을 하고 매일 먹을 걸 잔뜩 쌓아놓을 텐데.’

“그의 곁에 붙어있는 사람들을 얼른 헤니투스가의 편이 아닌, 왕국의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헤니투스가에게 지배받는 왕국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 얼마나 모욕적이겠습니까!”

‘사돈의 가문으로 불린다면 더 바랄 것도 없겠지. 이 경우엔 외척이 되려나?’

“차라리 보잘것없는 가문의 영애랑 빨리 결혼이라도 시켜서 그 권세를 미리 축소해놓지 않으면…!”

“자네.”

가만히 딴생각을 하며 적당한 표정으로 귀족의 말을 듣고 있던 알베르는, 결혼 얘기까지 나오자 이것만큼은 참고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알베르는 환하게 웃는 낯으로 귀족의 어깨를 쥐고서는 천천히 도닥여주었다.

“나라를 걱정해주는 자네의 마음은 잘 알겠네. 하지만 약속도 없이 이렇게 무작정 오니 당황스럽군. 나는 시급한 일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으니 다음에 얘기하지.”

“하지만 저하, 이보다도 더 시급한,”

“분명, 좋은, 일이, 자네에게 있을 테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게나.”

햇볕보다도 더 밝게 웃는 알베르의 얼굴에서 묘한 위압감이 나오는 것에 결국 귀족은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왕세자의 말에 아주 화색이 돌아서는 결국 그대로 꾸벅 인사를 하고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하아.’

알베르는 귀족이 사라지는 것을 보지도 않고 뒤를 돌아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필 고백 직전에 그가 읽고 있던 서신의 주인공이 직접 등장할 것이 뭐람. 그러고 보니 그 서신만 아니었다면 고백의 분위기가 좀 더 괜찮게 흘러갔을지도 몰랐다. 하필 자신을 욕하는 글을 읽고 난 다음에 고백을 받았으니 그가 기분이 좋았을 리가….

‘잠깐.’

알베르는 그대로 우뚝 섰다.

설마, 정말로 그것 때문인가? 알베르는 가만히 어젯밤 그가 했던 말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는 순간 드는 깨달음에, 손으로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시종장.”

빠르게 시종장을 부르자 항상 옆에서 대기하던 이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왕세자 저하.”

“케일 헤니투스 공자에게 서신을 넣게나.”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자신의 고백은 아직 가망이 있었다.

<4>

 

“당분간은 연락 안 하실 줄 알았는데요.”

약속 장소에 다시 나타난 그는, 어젯밤 있었던 일에 한 치의 영향도 받은 것처럼 보여 알베르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잔뜩 입꼬리를 올린 알베르는 그의 말에 능청스레 대꾸했다.

“길도 안 잃고 잘 찾아왔네?”

“이미 한 번 왔던 곳이니까요.”

그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알베르는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대신, 그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온 사막을 덮은 피 같은 색의 알갱이들, 그 위를 더욱더 붉게 물들인 노을 속에 서있는 그.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이 한 번 감겼다가 떠지고, 다시 그 암갈색의 눈동자가 드러나는 순간이 지독히도 느리게만 느껴져 알베르는 다시 한 번 자신이 그를 정말로 사랑하긴 하는 모양이라며 속으로 웃었다.

“왜 부르셨습니까?”

“어젯밤 네가 해주었던 말에 대한 대답을 해줘야만 해서.”

“저는 어젯밤 분명히 저하를 찬 걸로 기억하는데요. 제가 저하의 대답이 필요한 말을 했습니까?”

굳이 찼다는 말을 꺼내는 그가 미웠다. 그럼에도 온전히 미워하는 마음이 들지도 않아, 알베르는 그에게 잡혀 살 자신의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케일 헤니투스. 정말로 거절할 거라면, 그냥 내가 싫다고 했어야지.”

그는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고려해서 이야기했을 뿐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거나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손을 잡고 다정히 말하면 말했지.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듯, 그 또한 숨길 수 없었던 거라면….

알베르는 당당히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펴며,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실 넌…, 날 좋아하고 있잖아.”

“대단하신 자신감이네요.”

“싫어하는 사람의 고백을 거절하면서 누가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줘? 뭐… 소심하거나 엄청나게 섬세한 사람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는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

“그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알베르는 그를 보고 있던 시선을 옮겨, 사막 저 끝에 펼쳐진 노을을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태양은 점차 사막의 지평선에 잡아먹혀가고, 완전히 태양이 사라진 순간. 사막이 밤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젯밤, 네 대답에 맞춰서 말해주지, 케일 헤니투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알베르의 빛나던 금발과 하얀 피부, 그리고 새파란 하늘의 눈동자가 점점 까맣게 물들어갔다.

“낮의 산지옥? 그딴 거 알게 뭐야.”

“…….”

알베르는 새카만 하늘, 그리고 그와 똑같은 색깔을 띤 땅을 차례로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난 밤이 땀으로 내려온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둔, 다크엘프야. 네가 말한 신화대로라면, 신이 최대의 안배를 내려준 곳에서 태어나 이미 낮의 왕관까지 당당히 취한 왕세자인 나를 두고, 대체 무엇을 그렇게 망설이고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는 거지?”

알베르는 그의 손을 꽉 잡고 자신에게로 당겼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쉽게 끌려오는 그의 얼굴은 덤덤한 기색을 가장했으나, 그 두 눈은 어쩔 수 없이도 흔들리고 있었다. 거 봐. 알베르는 소꿉친구의 약점이라도 잡은 꼬마처럼 앙큼하게도 웃었다.

“너는 사랑이 곧 나태인지라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나태가 결국에는 사랑이라면 그 나태마저도 다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야.”

넌 날 너무 과소평가했어.

알베르는 그의 손등을 끌어당겨 그 위에다가 작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여전히 입술을 그 부드러운 피부에 아슬아슬하게 맞댄 채로, 속삭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 사랑하고 있어, 케일.”

알베르는 그의 손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그, 케일은 알베르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어젯밤과는 달리 잔뜩 초조한 낯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케일은 알베르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내려보았다가, 결국에는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욕심이 많으십니다.”

낮을 닮은 색깔을 가지고 있던 왕세자는, 이제 밤의 색깔을 드러낸 채 모든 것을 다 가지겠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낮의 빛나는 왕관, 그리고 밤 속의 안식까지. 케일은 정말이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서도 초조함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한 알베르가 다시 한 번 더 묻자, 케일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알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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