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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며 회색빛으로 부식된 기억은 갑작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아이가 아주 어릴 적, 옆집에 사는 금빛털의 리트리버보다도 키가 작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무엇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는 행복한 가정. 아이는 모나지 않고 온건했으며 형편은 적당히 부유했고, 부부는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했다. 그러나 매일 아침 나란히 출근을 해야 하는 부부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하루 5시간도 되지 못했다.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제 목에 걸린 현관 열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아이는 외로워도 불평하지 않았다. 아주 어른스럽게, 자신이 좋은 옷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의 노력 덕분이라며 혼자서 문을 열고 차갑게 식은 밥을 느리게 데워먹었다. 밤늦게 퇴근한 어른들에게 저녁 인사를 하고 나면 아이는 언제나 차갑게 식은 침대에서 홀로 잠이 들었다.

자기세뇌와도 같은 위태로운 행복이 지속되던 어느 날, 남자는 거대한 곰 인형을 업고서 힘겹게 현관으로 들어섰다. 어찌나 커다랗던지 깜짝 놀란 아이가 인형을 받아들자 그 인형에 깔려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남자는 크게 웃었고, 여자는 그런 아들을 안아 일으켜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밤마다 혼자 잠드는 네가 걱정이란다.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남자는 죄책감에 물든 얼굴로 웃으며 쓰러진 인형을 아이의 품에 안겨주었다. 인형은 새것임에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봄꽃 향기가 풍겼다.

좋은 친구가 되어줄 거야. 밤마다 너를 지켜줄 수도 있지. 여자가 중후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인형을 들썩거렸다. 마치 인형이 말하는 것 같아 아이는 신이 났다.

조명등 아래에서 빛나는 털은 밝은 갈색으로, 아주 부드러웠으며 희미하게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발바닥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필기체의 영어가 자수로 수놓아져 있었고, 목에는 고급진 벨벳 리본이 흐트러짐 없이 흔들거렸다.

아이는 말했다.

안녕, 잘 부탁해. 네가 있으니 이젠 밤이 춥지 않을 거야.

듬직하고 거대한 친구가 생긴 이후로 아이는 한동안 혼자서 잠들지 못했다. 제 옆을 지켜주는 커다란 무언가가 있다는 안도감과 온기가 전해져오는 듯한 따뜻한 착각에 빠져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밤 인형의 품에서 잠들었다. 아이가 소년이 되어가는 동안에도, 낡은 곰은 여전히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낡은 영사기가 돌아가듯 스쳐 지나가는 갈색 추억 속에서 곰 인형이 고개를 숙인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대한 곰은 계속해서 색이 바뀌고, 귀 모양이 달라졌으며 크기도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서서히 나이가 들어가는 친구의 모습에 막연히 눈물이 났다. 손을 뻗으면 잡히지 않을까. 많이 낡았지만, 여전히 품에 안으면 잠이 잘 올 것 같은데. 곰 인형은 유일하게 바뀌지 않는 진한 갈색 눈동자로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잘 자. 내 소중한 친구.

 

최하는 허공에 손을 뻗으며 눈을 떴다.

매일같이 잠들었던 익숙한 침대가,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

 

 

고양이 발자국이 한 개.

고양이 발자국이 두 개, 세 개.

고통을 참다못한 케일이 몸을 일으키며 침대를 벗어났다. 평소에는 품속에서 얌전히 잠만 자던 어린애들이 오늘은 대뜸 얼굴에 발도장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부드럽기만 했는데, 얼굴에 닿으니 숨어있던 발톱까지 튀어나와 뺨을 긁어대는 통에 얼굴이 온통 홧홧하게 부어올랐다.

날은 아직 새지도 않았는데 잠이 몽땅 달아나 더 잘 수도 없다.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보니 곧 해가 뜨긴 할 것 같은데.

답지 않게 이른 기상이 어색한 케일은 굳이 천을 걷어 하늘을 확인했다. 서서히 달이 옅어지는 것을 보니 역시 이른 새벽이었다.

“최한?”

커튼을 치고 물수건으로 얼굴을 식히려던 케일의 시야에 시커먼 물체가 들어왔다. 머리도 까맣고 옷도 까만데,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오러 마저 검은빛을 품어 멀리서 보니 커다란 먼지 덩어리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최한이 원래 이러게 일찍 일어나던가? 일이 없으면 언제나 해가 질 때 일어나는 케일로서는 부지런한 전 남고생, 현 소드마스터의 기상 시간을 알리가 만무했다. 워낙 성실한 녀석이니 늘 이 시간에 일어나는가보다- 라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오러를 피워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케일은 생각했다. 먼치킨 주인공인 저 녀석이 왜 아직도 내 옆에 있는 걸까. 원래 수도에서 떼어내려고 했는데. 행복한 노후생활에 최한 같은 강자가 끼어있으면 또 일이 많아지겠지, 최한은 별장 하나 따로 만들어주든가 해야겠다. 그런데 저 모습을 어디서 봤더라. 새카맣고 커다란 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지.

“아.”

이X집 토X로. 먼지투성이인 다락방에서 튀어나오는 그 검댕이. 연휴 때마다 어린아이들을 위해 몇 시간씩 틀어주던 그 장면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튀어나왔다.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케일 님?”

창가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멀리서 앉아있던 최한이 어느새 창문 앞에서 고개를 기울이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웃기 시작하니 무슨 일이 있나 하여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뻐끔뻐끔. 제 말이 들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최한은 소리 없이 입만을 움직여 말하고 있다.

“다 들려. 아침부터 부지런하네.”

케일이 대답하며 창문을 열려 하자 최한이 흠칫하며 고개를 저었다.

“새벽 공기는 건강에 나쁩니다. 열지 않으셔도 돼요.”

“밖에 있는 녀석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은데. 지금 일어난 건가?”

“아뇨, 일어난 지는 좀 됐습니다. 다만, 그 뒤로 잠이 다 달아나버려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수련이라니. 성실함의 표본 같은 녀석이었다.

“케일 님은 어쩌다 이 시간에,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최헌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케일이 죽기 직전까지 아파했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는 것이 얼굴에 훤히 보였다. 케일은 주변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검은 오러에 몸을 슬쩍 뒤로 물리며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용 발자국까지 찍고 싶지는 않아서.”

고개를 돌려 뺨에 선명히 남은 고양이 발자국을 보여주자 창 너머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웃긴 거지. 생각보다 엄청나게 아픈 걸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만 웃고 몸 상하기 전에 들어가라. 또 밤새우지 말고.”

“하하, 네. 케일 님. 명심하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바위로 향하는 최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케일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들어가라니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어느새 새벽이 물러나고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최한이 좀 이상해요.”

“그렇군요.”

케일은 로잘린의 말을 무덤덤하게 받아쳤다. 그 녀석 이상한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홍차를 한 입 마실 때마다 공중을 돌아다니는 애플파이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방금 구운 건가. 맛있네.

“고기를 포크로 자르려 하고, 나이프로 찍어서 먹었어요. 포크로 고기가 쉽게 잘린다는 걸 이렇게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아. 근심 가득한 한숨 소리에 케일은 양손에 애플파이를 들고오는 라온을 밀어내며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걱정되는 모양인지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케일의 안색이 덩달아 안 좋아졌다.

“정신적인 문제입니까?”

“잘 모르겠어요. 어디 아프냐고 물어봐도 괜찮다고만 하고……. 요새 들어 잠에 잘 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그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로잘린의 말에 문뜩 사흘 전 잠이 오질 않는다며 동이 틀 때까지 수련을 하던 최한이 떠올랐다. 설마 그날 이후로도 계속 제대로 못 잔 건가? 자신은 심장의 활력이 있어 며칠 밤을 새워도 몸 상태가 괜찮았지만 최한은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멍한 표정의 최한이 포크로 스테이크를 써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섬뜩했다.

“수면을 유도하는 약이라도 지어야겠군요. 사흘 전에도 잠이 안 온다 했습니다.”

“외상이 아니면 신성력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제가 가서 지어올게요, 가는 김에 공자 보약이라도 타 올까요? 히드라의 껍질이 각혈에 좋다던데.”

“……마음만 받겠습니다.”

찻잔을 쥔 케일의 순이 미세하게 떨렸다. 뱀 허물을 팔팔 끓여 만든 물 같은 건 죽어도 마시고 싶지 않다. 로잘린은 케일의 안색이 파리해지자 장난이라며 크게 웃었다.

“장난이에요, 장난. 공자는 요새 아픈 곳 없죠?”

“없습니다.”

딱 잘라 대답하는 케일의 모습에 다시 한번 호쾌하게 웃은 로잘린은 이만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재가 소용이 없으면 제가 때려서라도 재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요. 차 잘 마셨어요. 뒷주머니에서 흑단으로 만든 스태프를 꺼내어 흔들어 보인 로잘린의 모습에 등골이 서늘해진 케일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약재가 아주 효과적이길. 소드마스터의 뒷목에 멍이 든 광경을 봤다가는 아침이고 점심이고 케일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

 

 

“최한이 화난 것 같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우리 약한 인간은 내가 지킨다!”

약재의 효과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듯 최한의 몰골은 날이 갈수록 퀭해지고 있었다. 인간이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 매우 예민해진다는 사실을 라온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최 눈앞에 보이는 괴물을 빠르게 도륙하고 있었다. 근처에 가기만 해도 넘쳐흐르는 살기에 피부가 아려왔다.

“냅둬라. 저렇게 몸을 써야 금방 피곤해질 테니까.”

수련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것 같다며 케일과 함께 어둠의 숲을 찾은 최한은 괴물의 둥지까지 찾아내어 박살을 내고 있었다. 어둠의 숲을 평화지대로 만들기라도 하려는건가. 하지만 저렇게 무리하면 한 이틀은 곤히 잠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삭신이 쑤실 테니 손가락도 하나 까딱하지 못하겠지.

케일은 피 튀기는 숲에서 고개를 돌려 밖에서 최한과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약은?”

“먹은 직후에 잠시 나른해지긴 했지만……. 효과는 없었습니다.”

“하루에 몇시간 씩 자고 있는데.”

“일주일 동안 두 시간 정도 잔 것 같습니다. 음, 눈을 감고 있어도 깨어있는 상태로 밤이 지나가 버려서.”

“살아있는 게 용하네. 정말 짐작 가는 게 없나? 신경이 쓰이는 것이라던지.”

“없, 모르겠습니다.”

“……그래. 한동안 로잘린은 피해 다녀라.”

“……? 네. 알겠습니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거지.”

“약한 인간아. 최하니 거짓말을 하고 있나?”

“그래.”

최한은 거짓말을 했다. 워낙에 건실한 녀석인지라, 조금만 거짓말을 하려 치면 얼굴에 다 티가 났다. 그렇다면 왜 이유를 숨기는 거지? 불면증을 해결하지 못하면 괴로운것은 본인일텐데.

케일이 고민하는 사이 최한은 몬스터의 피와 살점으로 뒤덮인 망토를 펄럭이며 더 깊은 숲 속으로 사라졌다.

뭐, 그래도 한동안은 제대로 잘 수 있겠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최한은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아도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환하게 점멸하는 시야와 코끝을 자극하는 피 냄새가 티끌만큼 남아있던 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싸늘하게 식은 침대에서 최한은 아주 잠깐 의식을 놓았다. 몸이 죽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

 

 

 

“바깥 좀 보라는 건데!”

케일이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온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케일을 잡아끌었다. 밤도 늦었는데 얘가 왜 이래. 침대를 바라보니 홍과 라온은 서로 부둥켜안고 이미 잠들어있었다. 머리에서 뚝뚝 흐르는 물기를 대충 수건으로 훔쳐내며 온이 이끄는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가 그리 급한지 달려가는 모양새만 보면 밖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느껴졌다.

“…….”

창 밖의 광경을 목격한 케일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저기에 원래 나무가 없던가? 공사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최한이 미쳤는데! 갑자기 막 나무 베면서 사라졌는데!”

“뭐? 언제?”

“조금 전 까지 가만히 서 있었는데. 아직도 저 안에 있을 것 같은데…….”

돌겠네. 케일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쏟아졌다. 밤중에 저러고 있다는 건 잠드는 것에 또 실패했다는 소리였다. 최한의 저주 같은 불면증이 시작된 지 약 열흘이 지났다. 충분히 정신을 놓을만한 기간이었다.

한국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인간은 일정 기간 동안 숙면을 취하지 못하면 이성이 붕괴하여 미쳐버린다고. 밥을 먹지 못하면 굶어죽고, 성욕을 채우지 못하면 죽지는 않지만 이성의 끈이 약해지고, 잠을 자지 못하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좀비처럼 변해버린다고 했다. 지금 최한의 상태가 그랬다. 신체가 남다른지라 겉으로는 보이는 것이 별다름이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벌어지는 기이한 행동들에서 티가 났다.

“가자.”

더 생각할 것 없이 케일은 발에 바람의 힘을 두르고 온을 안아 들었다. 비유라고는 해도 좀비가 된 소드마스터는 얼마나 위험할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저대로 있다간 이 지역 일대를 풍비박산 내고 영원한 잠에 들겠다며 큰일을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케일의 상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최한은 자신이 잘라낸 수많은 나무 밑동들을 바라보며 미동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톱으로 자른 것보다 더 깔끔하게 잘린 나무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바닥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케일은 땅에 발을 딛고 천천히 최한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스무 걸음 이상 떨어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미친 듯이 울렸다.

-희생하는건가.

-저건 나도 못 먹어. 버텨봐야 두 번 정도. 도망쳐, 심장은 지켜줄게.

“시끄러워.”

정신사납게 떠드는 두 고대의 힘을 진정시킨 케일은 제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품에 안겨있는 온을 쓸었다. 아직 제정신이려나.

“온. 안개로, 윽!”

“위험한데!”

시야가 뒤집히며 몸이 바닥을 굴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케일의 팔이 결박당하는 동시에 튕겨져나간 온이 최한을 노려보며 다급히 안개를 둘렀으나 이미 이성을 잃은 탓인지 최한은 아무렇지 않게 케일에 이를 드러냈다.

“최, 크윽. 최한!”

오른팔과 목을 짓누르는 엄청난 악력에 케일은 발버둥도 칠 수 없었다. 움직이면 부러트리겠다는 듯 목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온. 움직이지 마. 가만히, 컥!”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최한의 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무를 베는 도중 부러졌는지, 아니면 어디로 날아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제대로 된 검을 쥐고 있었다면 단번에 목이 날아갔겠지. 케일은 유일하게 자유로운 눈동자로 온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제자리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선택지가 없었다. 쓰고싶지 않았는데.

“이건 네 잘못이다.”

케일의 왼손에서 금빛의 붉은 벼락이 작게 튀어 올랐다.

 

 

 

*

 

 

 

“이유나 물어보자.”

“…….”

“약한 인간 죽었으면 어쩔뻔했나!”

“…….”

“무서웠는데. 죽는 줄 알았는데.”

“누나 울었는데. 용서 못 하는데.”

무릎을 꿇은 최한이 점점 움츠러들었다.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살짝 타들어 간 검은 머리카락이 가루가 되어 조금씩 바닥을 더럽혔다. 옷은 이미 다 타버려 임시방편으로 욕실에 걸려있던 샤워가운을 입고 있었다. (이 시간에 론을 불렀다가는 최한과 론의 2차전이 벌어질 것이 뻔했고, 케일의 옷은 최한에게 작았다. 합리적인 판단하에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지진이 일어날 듯 가련하게 흔들리는 최한의 눈동자가 멍이 든 케일의 뒷목으로 향했다. 그 시선이 불편하여 오른손으로 목을 가리니 이번엔 손가락 모양대로 멍이 든 오른손목으로 시선이 끌렸다. 저러다 울겠다.

“그만해라. 제정신도 아니었잖아. 네 잘못 아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바닥 말고.”

자신이 꿇린 것도 아닌데 괜히 부담스러웠다. 멍도 어차피 내일이면 없어질 텐데. 누가 다친 것도 아니고. 제 무릎 위에서 한참을 울던 온을 침대에 내려두고 발로 최한을 툭툭 치던 홍과 라온도 이불 위에 올려두었다. 저였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론이나 비크로스, 로잘린이나 라크 같은 최한을 공격할 수 있는 상대 앞에서 정신을 잃었다면 아까 같은 자비는 없었을 것이다. 바로 목이 부러졌겠지. 그리고, 이젠 정말 물어봐야만 했다.

흐릿한 눈동자를 끔뻑이며 일어난 최한이 케일의 맡은 편 의자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얼굴에 혈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엔 거짓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라. 다른 사람들 더 다치기 전에.”

죄인처럼 공손히 손발을 모아 앉은 최한이 입을 뻐금거렸다. 케일은 이유를 듣기 전까지 돌려보내 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느긋하게 팔짱을 끼었다.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그래. 최한아! 어디가 아픈지 말을 해라!”

“울보 누나 또 울면 안 되는데! 이유를 빨리 말하라는 건데!”

“홍이가 누나한테 맞고 싶나 본데.”

고양이 두 마리가 투닥대기 시작하자 움츠러든 최한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꿈을, 꿨습니다.”

“꿈?”

“네. ……꿈을 꿨습니다. 정말 별것 아닌 꿈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잠을 전혀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해리스 마을의 꿈이라도 꾼 건가. 케일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잤다면 굳이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괜히 입 밖으로 내서 트라우마를 증폭시킬 필요가 없다.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던 찰나, 최한이 말했다.

“어릴 적에 선물 받은 인형이 꿈에 나타났습니다.”

인형?

“어릴 적에는 부모님 두 분께서 다 일을 하시느라 저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게 마음이 걸리셨는지 엄청나게 커다란 인형을 선물해 주셨는데, 그걸 안고 자기 시작하자 인형 없이 못 자는 버릇이 잠깐 생겼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그 인형을 버릴 수가 없게 되어서. 그 당시에는 제 몸집보다 커다랬는데 어느새 침대 옆 장식품이 되었다며 말하는 최한의 눈동자는 어딘가 목마른 여행객 처럼 보였다. 케일은 최한에게 생긴 불면증의 원인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의문인 점이 있었다.

“이걸 왜 숨긴 거지?”

이유를 빨리 들었다면 해결책도 더 빨리 갈구할 수 있었다. 저택의 정원도 무사했을 것이고, 제 목과 손목도 혹사당하지 않았을텐데. 들어보니 생각보다도 더 별것이 아닌지라 케일은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어릴 때 인형을 안고 잤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최한의 귓가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릴 때 인형 안고 잔 게 뭐가 그리 부끄러워서 거짓말도 못하는 녀석이 이 지경까지 일을 벌인단 말인가. 최한의 말에 침대 위에서 뾰로통해 있던 평균 9세들이 슬금슬금 기어 내려와 최한을 다독여주었다.

“인형을 안고 자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홍이도 아기 때 누나 안고 잤는데.”

“맞는데! 누나랑 껴안고 잤는데.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잘 노네. 비록 정원은 박살 났지만,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실마리가 생겼으니 어서 해치우고 자고 싶었다.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한 밤이었다.

“최한.”

“네. 케일 님.”

“누워.”

“네?”

케일은 친절히 이불을 걷어 최한이 누울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웃었다. 누워.

 

 

*

 

 

 

 

“케, 케, 케일, 님. 이러,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아니, 그, 왜 이러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조용히 하고 자라. 애들 깬다.”

머리에 닿는 베개는 엄청나게나게 푹신했다. 몸을 덮은 이불도 가벼워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나, 잠이 올 리가 없다. 열흘이나 저를 괴롭혔던 고질병이 아직 낫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여기 누워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으니 몸의 긴장을 푸는 것도 어려웠다. 이불에서 풍기는 옅은 홍차향기에 정신마저 혼미했다.

“이번엔 잘 수 있을 거다.”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가볍게 내려앉은 손가락이 시야를 가려주었다. 어둡다. 온몸이 다시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마치 마법처럼.

경직된 몸이 타인의 체온에 의해 서서히 풀려가기 시작했다. 춥지 않다. 따뜻했다. 그때 처럼. 제 옆에 있는 것은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인데. 어쩐지 듬직해져 온몸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려버렸다. 눈이 감겼다. 손에서 홍차의 향기가 났다. 귓가에, 낯익은 것이 들린다. 너무 작아서, 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는다.

 

 

 

 

 

 

“약한 인간아. 곰 인형은 시장에 많다! 위대한 내가 최한에게 사다 주겠다!”

“최한은 곰 인형이 없어서 못잔 게 아니야.”

동글동글한 머리가 고개를 돌려 케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최한이 말했다. 어릴 때 곰인형 없이 못 잤다고. 곰 인형이 그리운 게 아닌가?”

케일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욕구는 생존과 밀접한 관계였다. 하루 치의 먹을 것이 있어야 하루를 살아갈 수 있고, 하루 치의 잠을 자야 다음날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하루 치의 먹을 것으로 나흘을 버티고 하루 치의 잠으로 일주일을 견뎌내야 했던 어둠의 숲에서 최한의 욕구체계는 완전히 망가져야만 했다.

“먹지 못하고, 잠들지 못하고. 그저 살아있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하는 때가 최한에게 있었을 거다. 그 시절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여전히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았으니 인제야 욕구가 폭주한 거지. 그걸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막아둔거다.”

곰 인형만 있으면, 그것만 있으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바람만 불어도 깨고,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검을 뽑고. 그러지 않아도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케일은 어느새 기절하듯 잠이 든 최한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최한이 원하는 건 자신이 자는 동안 옆을 지켜줄 누군가였겠지.”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아침 해가 뜨면 함께 꽃을 보러 가자.

달임이 떠오르면 함께 별을 보러 가자.

숲 속 동물들도 함께 보러 가자.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자는구나, 우리 귀여운 아가.

 

아이의 눈앞에 곰 인형이 있었다. 붉은 머리의 곰 인형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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