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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

*

 

모든 것이 끝났다. 암의 고위층 세력들은 대부분 죽거나 불구가 되었으며 얼마 남지 않은 일원들 또한 소드마스터의 손에 몰살당했다. 최한이 대륙의 영웅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은 추대할 대상이 필요했고 검은 머리의 소드마스터는 자연스레 그들의 주목을 받았다. 길거리에서는 최한의 초상화를 팔았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영웅이 탄생했노라고 환호했다. 귀족 집안 자제들은 염색 마법을 통해 머리를 검게 물들였다. 아이들을 장난감 검을 휘두르며 자신도 소드마스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비록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대륙은 황폐해졌고,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다 사망한 국민들의 수가 몇백 명을 웃돌았으며, 다크엘프라는 것이 발각된 왕세자 알베르 크로스만은 사형당했지마는. 비로소 끝이었다.

최한은 더는 할 것이 없었다. 복수는 마무리되었으며 왕세자가 없으니 새로이 명을 내려줄 사람도 없었다. 축배를 들며 종전의 여유를 즐기던 왕궁의 무도회는 불편할 뿐이었다. 셋째 왕자가 건네던 샴페인 잔을 어설프게 거절한 최한은 그날 밤 궁을 떠났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무뎌진 정신으로 무작정 발을 디뎠다. 마차를 빌려 타고 농가에 신세를 지며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무의식은 최한을 익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발을 멈춘 그 앞에는 낯익은 숲이 있었다. 모든 것의 시작점이었다. 최한이 처음 떨어진 장소이자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곳. 많은 혼란 속에서도 어둠의 숲은 변함없었다.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제대로 보이는 것은 없었으나 숲 안쪽에서는 괴음이 간간히 들려왔다. 몬스터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최한은 이유를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담담한 걸음이 나뭇잎을 밟았다. 숲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는 최한 앞에서 몬스터들은 숨을 죽였고 기척을 숨겼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가장 큰 나무 아래로 향했다. 물기 어린 풀이 평탄한 땅을 덮고 있었다. 대충 검을 옆에 내려놓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조금 피곤한 것도 같았다. 몸을 뒤로 누였다. 왕궁의 호화로운 침대보다 편안했다. 눈이 느리게 감겼다.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최한은 간만에 꿈을 꿨다.

 

*

 

눈을 깜박인다. 온통 까맣다. 눈을 다시 깜박인다. 여전히 어두울 뿐이다. 어둠이 몸을 감싼다. 그러나 숲에서 느끼던 것과는 다른 부류의 암흑이다. 최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스락, 바스락, 하는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옮기자 새하얀 침대보가 보였다. 온통 검은 공간에서 유독 희어 도드라졌다. 진흙 얼룩 하나 없이 말끔해서 최한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 꿈이구나. 최한이 작게 침음했다. 그러고 보니 꿈이란 것이 있었다. 다만 최한은 ‘꿈’을 망각한 지 오래였다. 이곳의 세계는 너무 긴박하게 돌아갔다. 꿈은 사치에 불과했다. 숲에서는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받을까 봐 밤잠을 설쳤고, 숲을 나오고 마을이 몰살당한 이후에는 암을 향한 분노 때문에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꿈에서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더라.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깨어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최한의 오랜 버릇은 그를 초조하게 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소드마스터가 아닌, 대륙의 영웅이 아닌, ‘최한’으로 살아가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다. 고민 끝에 서툰 자세로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벌겋게 달아오른 볼이 얼얼함을 호소했다. 아픔에도 주변 풍경은 여전했다. 쉽게 깰 수 있는 꿈은 아닌 듯했다.

망설이다 침대 밖으로 다리를 조심히 뻗었다.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어둠으로 발을 내디뎠다. 곧 발끝에 단단한 바닥이 닿았다. 남은 한 발마저 디뎠다. 이어 몸을 쭉 내민 최한이 허공에 손을 더듬었다. 어차피 꿈이니깐. 예전에 꾸던 꿈 중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우선은 그렇게 답했다. 앞쪽에서 날카로운 모서리가 만져졌다. 선을 따라 손을 쭉 뻗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 직각으로 꺾어진다. 따라 손을 꺾었다. 겉을 따라 몇 번이고 만져 보고 나서야 탁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탁자 위에서 손을 휘젓자 둥그런 램프 옆면에 닿았다. 위쪽에 달린 손잡이를 쥐었다. 화륵, 심지에 불이 붙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빛이 주변을 밝혔다. 꿈이니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다. 대충 넘기고는 꿈속 공간을 둘러봤다. 심플하면서도 아늑한 방이었다. 최한이 누워 있던 침대와 램프가 있던 탁자, 검은 옷 한 벌이 걸린 의자, 나무로 된 옷장이 전부였다. 반쯤 열린 창문에 걸린 커튼은 작게 살랑이고 있었다. 서글한 햇빛이 방안을 비추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아까의 상황이 무색할 만큼 모든 것이 선명했다.

최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문 근처로 다가가자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창문 밖의 들판과 나무 그늘에 놓인 다과 테이블로 추정해 볼 때 꿈의 배경은 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풀 위에선 고양이 두 마리가 뒹굴고 있었다. 시선이 테이블 옆에 앉아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팔을 괴고 있는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군지 알 것 같으면서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화려한 제복과 우아한 자태로 보아 귀족인 듯했다. 남자는 고양이를 응시하다, 청명한 하늘과 곱게 걸린 구름 조각을 거쳐, 때마침 성에서 나오던 백발의 남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손에 들린 음료 잔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었다.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레모네이드였다. 가볍게 목례한 남성이 뒤를 돌았다. 익숙한 이였다. 최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론, 틀림없이 론이었다. 램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즐겁다는 듯 잔잔히 미소 지은 얼굴과 최한의 기억 속 싸늘하게 굳은 시체가 겹쳐 보였다. 답지 않게 동공에 감정이 어렸다. 최한이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와중에도 예민한 청력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잡아냈다. 타박, 타박, 긴장감 하나 없이 가벼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발걸음이 멈추고, 문이 열리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한 명의 최한이 보였다. 조금 더 온순한 눈매와 상처 없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웅 흉내가 아닌 최한 자신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심장 부근에 저릿한 통증이 퍼졌다. 또 다른 최한이 방안을 느리게 훑었다. 코앞에 있는 이질적인 존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땀으로 축축해진 손에서 램프가 미끄러졌다. 최한의 시선이 의자에서 멈췄다. 쨍그랑, 램프가 바닥에 부딪혔다.

 

*

 

최한이 퍼뜩 눈을 떴다. 구름 한 점 없이 어두운 하늘이 시선에 담겼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뺨을 때렸다. 간간히 벌레들이 우는 소리만 들렸다. 입술이 바싹 탔다. 심장은 더는 아프지 않았다. 해가 저문 것으로 보아 못해도 대여섯 시간은 잔 듯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호기심이 컸다. 망설이던 최한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뒤로 며칠 내리 꿈만 꿨다. 끼니도 거른 채 깨고 잠들기만 반복했다. 두 번째 꿈에서는 자신이 구하지 못했던 어린 용을 봤다. 평범한 고양이인 줄로만 알았던 묘족 두 마리와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세 번째 꿈에서는 암의 기습으로 사망한 로잘린을 봤다. 고고한 기세를 내뿜는 백금발의 남성과 함께 무언가를 논의 중이었다. 네 번째 꿈에서는 라크와 그의 어린 동생들을 봤다. 처음 만났던 때의 유순한 얼굴로 검술을 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 여섯, 일곱, ……. 최한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걸신들린 사람처럼 그들을 탐독했다. 어릴 때 읽었던 동화 같았다. 이곳은 지독하게 평화로웠다. 간혹 그들이 겪던 고난과 좌절은 며칠, 길어봤자 몇 주 후면 해결되는 약간의 언덕에 불과했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며 상처는 치료를 통해 나았다. 헤어 나오기 힘든 이야기였다. 최한은 램프를 쥔 채로 꿈 곳곳을 돌아다녔다. 더는 볼 수 없는 자들을 만났다. 가슴의 통증은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 망설이던 걸음은 점차 담대해졌다. 대저택의 계단을 오르고 대련장에 주구장창 앉아 있었다. 그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꿈의 중심에는 언제나 ‘케일 헤니투스’라는 이름의 붉은 머리 남성이 있었다. 최한은 닳고 마모된 기억을 뒤져 그가 누군지 생각해 냈다. 생명을 경시하고 술에 절어 살던 부도덕하고 멍청한 이였다. 자신의 주먹에 눈이 붓고 얼굴에 멍이 들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던 이였다. 어디까지나 최한이 알고 있는 케일 헤니투스였다. 꿈속의 케일 헤니투스는 조금 달랐다. 그가 읽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 남자는 많은 생명을 구했으며, 암을 무찔렀고, 로운을 제국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최한은 그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 이 꿈의 주인공. 히어로.

우습게도 이 이야기에는 최한도 있었다. 스물네 번째 꿈에서 최한은 비로소 최한을 살피기 시작했다. 주인공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주연인 듯했다. 그는 최한보다 약했다. 그의 오러는 불안정했으며 검술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최한이 목을 벴던 암의 수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다. 그럼에도 꿈속의 최한은 뭐가 좋은지 자꾸만 웃었다.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을 하고는 케일 헤니투스를 바라보던 순수한 눈동자에 최한이 괜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등장인물 최한이 누리는 행복을 최한은 그저 오래 지켜봤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무시하며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둘 사이에는 두툼한 벽이 있었다. 어차피 전부 꿈이고 이야기였다. 최한이 유일한 독자이자 작가인 세계. 그의 욕심이 창조한 세계였고 그의 이상을 토대로 구성된 세상이었다. 최한은 전지전능했으나 무능한 신이었다. 그들은 최한으로 인해 행복했으나 최한은 그 행복을 대신 누릴 수 없었다. 철저한 방관자였다. 최한은 문득 허기를 느꼈다. 숨을 쉬기 버거웠다.

 

*

 

경험을 통해 알아챈 바에 의하면, 꿈에서 깨는 방법은 간단했다. 램프의 불빛이 꺼지기만 하면 되었다. 허기가 쉬이 사그라지지 않자 조심히 램프의 불을 껐다. 아늑한 방이 사라지고 우중충한 숲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주머니를 뒤졌다. 농가에서 받았던 꾸러미가 손에 잡혔다.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로 며칠 만에 느낀 배고픔이었다. 꾸러미를 풀고는 마른 고기 한 조각을 씹어 넘겼다. 배가 고팠다. 작게 조각난 살점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허기는 여전했다. 흉터가 가득한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지극히 정상적인 생리 현상이었으나 최한에게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꾸러미 안의 것들을 죄다 삼켰다. 위장은 여전히 먹을 것을 달라고 재촉했다. 쪼그려 앉은 최한이 주변을 뒤져 먹어도 괜찮은 버섯 몇 개를 뜯어냈다. 조리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입에 구겨 넣었다. 침과 버섯이 뒤엉켰다. 몇 번 씹지도 않고 대충 조각난 채로 삼켰다. 위장이 텅 빈 것 같았다. 속이 덥수룩했는데도 배는 고팠다. 먹을 것이 필요했다. 손이 닥치는 대로 풀을 잡아 뜯었다. 털어내지도 않은 채 삼켰다. 입가에 흙 부스러기가 묻었다. 여전히 배가 고팠다.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그루터기를 짚은 최한이 제 얼굴을 바닥에 박았다. 우욱, 구역질을 신호로, 삼켰던 것들을 꾸역꾸역 토해냈다. 몸은 계속 배가 고프다며 아우성쳤다.

배가 고팠으나 먹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무리 먹어도 허기는 가시지 않아 먹고 또 먹다가 속을 게워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 번은 숲을 나가 헤니투스가 영지를 찾아갔다. 첫 방문 때 그러했듯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던 기사들을 앞에 두고 최한은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검 손잡이를 감싸 쥐었다. 애꿎은 사람들이 다치는 건 내키지 않으니깐.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맴돈 것은 그때였다. 꿈 속 케일이 했던 이야기였다.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느리게 멈추었다. 최한은 검을 휘두르는 대신 로브를 벗었다. 길거리에서 심심찮게 보이던 익숙한 얼굴에 기사들은 충격을 숨기지 못했다. 잽싸게 문을 열며 사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한은 괜찮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곧 달려온 집사가 그를 맞이했다. 자신을 한스, 라고 소개하는 집사를 최한은 이미 잘 알고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본성을 억누르며 음식을 좀 내어줄 수 있냐고 정중히 물었다. 당연하게도, 대륙의 영웅에게 주어진 것은 진수성찬이었다. 뿌듯함과 자부심이 가득한, 꿈과 똑같은 얼굴을 한 한스를 앞에 두고, 최한은 식탁 위 만찬을 느리게 살폈다. 육즙이 배어나는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입 안 가득하던 따뜻한 온기는 목을 넘어가는 순간 사라졌다. 한 점을 더 먹었다. 함께 나온 레모네이드를 벌컥, 들이켰다. 당황스러운 얼굴의 한스를 무시하며 음식들을 집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손으로 접시를 끌어왔다. 바삭하게 잘 구운 파이를 통째로 삼켰다. 과일로 장식된 샐러드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속이 거북했다. 그럼에도 머리는 더 많은 것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최한은 결국 헤니투스 가 영지를 뛰쳐나왔다. 애써 붙잡은 이성으로 한스에게 내가 온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 라고 한마디 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둠의 숲의 익숙한 나무 아래로 뛰어가 전부 토해냈다.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배가 고팠다.

처음 어둠의 숲에서 살았던 때보다, 암과의 전쟁을 벌이던 때보다 몸이 야위어 갔다. 불안감이 짙어졌다. 최한이 할 수 있는 일은 꿈을 꾸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최한은 다시 잠을 잤다. 꿈속에서도 허기는 여전했다. 온몸에 흐르는 찌릿한 고통은 점점 커졌다. 그럼에도 최한은 그들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잃은 것들을 곱씹었다. 고이 묻어둔 감정이 기승을 부렸다. 현실과 꿈의 차이점이라고는 케일 헤니투스, 한 사람뿐이었다. 한 사람뿐이었으나, 그 하나의 변화로 모두가 행복했다. 제3자의 눈에서도 그것이 보였다. 최한마저 행복했다. 그는 투닥거릴 친구가 있었고, 충고해줄 이가 있었으며, 충성을 바친 상대가 있었고,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최한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목구멍이 따끔했다. 서른한 번째 꿈에서의 일이었다.

 

*

 

"최한, 요새 무슨 일 있어?"

"예, 예? 아니에요, 케일님."

뭔가 아파 보여서. 아님 말고. 심드렁히 대꾸한 케일이 다시 벽에 편히 기댔다. 먹기 좋게 썰린 복숭아 조각이 붉은 순 사이로 들어갔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최한이 다시 검을 쥐었다. 검은 오러가 기세 좋게 허공을 갈랐다. 평소에 비해 짧은 길이였다. 최한이 입술을 달싹이다 검을 고쳐 쥐었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는 나무를 베었다. 또 한 명의 최한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서른네 번째 꿈이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최한을 살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이 버거워 보였고, 행동이 미세하게 무거워졌으며, 종종 식은땀을 흘렸다. 무심코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을 옥죄이는 이 감각이 그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허기가 진해졌다. 최한이 최한을 응시했다. 여전히 배가 고팠다.

최한이 아픈 이유가 꿈속에 두 명의 최한이 존재해서라면. 이렇게 흠 하나 없이 완벽한 세계의 오점이 되어서라면. 어느덧 꿈을 벗어나 자기 멋대로 성장하고 있는 세계가 두 명의 최한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그러면 해결법 또한 단순했다. 최한은 비로소 이 허기를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성을 잃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대련장을 빠져나가는 케일을 흘낏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가볍게 문이 닫힘과 동시에 손을 뻗었다. 눈앞에 있는 이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놀라울 정도로 쉽게 잡혔다. 최한의 시선에 당혹감이 어렸다.

“뭐야, 넌, 누구….”

최한이 아무 말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몸을 파고드는 고통에 최한이 울컥, 피를 토해냈다. 절망을 매개체로 성장한 소드마스터의 위력이었다. 바닥을 나뒹굴던 최한이 검을 빼 들었다. 최한 또한 기다렸다는 듯 검을 들었다. 두 개의 검은 오러가 뒤엉켰다. 정제되지 않은 난폭한 어둠이 대련장에 가득 찼다. 칼날이 공간을 갈랐고 둘의 몸에 크고 작은 자상을 남겼다. 굉음이 가득 울려펴졌다. 두 시선에 치열한 독기가 어렸다. 그럼에도 결과는 예정된 것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어둠은 대륙의 영웅을 이길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한의 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오러 하나가 사그라들었다. 평범한 검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매끈한 절단면에서는 피가 몽글몽글 솟아났다. 먼지 날리던 땅에 붉은 피가 깔렸다. 최한이 다시 칼을 높이 쳐들었다. 몸이 어서 먹을 것을 달라며 아우성쳤다. 심장이 너는 이곳에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무심한 얼굴로 바닥의 최한을 내려봤다. 공포감에 질린 얼굴이 최한을 올려다봤다.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칼이 허공을 갈랐다.

 

*

 

"소드마스터의 시체가 어둠의 숲 입구에서 발견되었잖습니까."

"그래, 어딜 가나 그 얘기더군. 오른팔과 목이 잘린 채라고 했었나."

"네, 뒤늦게 궁에서 기사를 보냈지만, 결국 팔도 목도 못 찾았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절단면이 오러로 잘린 듯 매우 깔끔해서, 사실은 동료 분들이 사망한 충격으로 미쳐버린 나머지 자살을 한 것이라는 소문도……."

"예끼, 불경한 말이네."

"하기야, 그렇긴 하죠. 술이나 마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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