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270화를 기준으로 쓰인 글입니다.
그 영웅의 색(色)
“오러를 쓸 수 없게 되었다고?”
사뭇 심각한 내용과 달리 그 말을 하고 있는 케일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그런 모습이야말로 케일답다고 생각하며 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였다. 아무리 힘을 가다듬어도 최한 특유의 새카만 오러가 나타나지 않았다. 채 갈무리 되지 않아 거칠기 짝이 없는 오러는 그가 지닌 최강의 무기였다.
‘그런 막강한 힘이 영문도 모르게 사라졌다.’
케일 일행에게 큰 지장이 올 것이 분명했다. 케일에게 조심스럽게 보고하는 최한의 표정이 어두운 건 그 이유에서일 터. 그러나,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케일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아할 법도 하지만 최한은 나름대로 답을 내렸다.
‘나를 믿고 계신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최한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라크가 광폭화를 못해 쩔쩔매고 있을 때조차 일말의 재촉 없이 그를 격려해주었던 케일이다. 1차 성장을 겪느라 갓난아기처럼 꼼짝도 못 하던 라온을 끝까지 품에 안아 들었던 바로 그 케일이다. 아무리 약해지더라도 버리지 않는 케일의 모습을 보며 최한은 가족의 의미를 실감하곤 했다.
내가 극복하고 성장하기를 기다리시는 거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최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끝에서부터 힘이 죽죽 빠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으나 기분 탓으로 넘기며.
그러나 정작 케일의 생각은 달랐다.
‘큰일인데.’
최한이 오러를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영웅의 탄생> 5권까지 등장은커녕 그럴 낌새도 내비치지 않았다. 자신이 스토리에 개입한 후 본래의 전개보다 더 빠르게 상황이 흘러가게 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개 주인공의 슬럼프는 하이라이트 직전에 일어나는 것 아닌가. 케일은 자신이 <영웅의 탄생>의 어디 즈음에 와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미지의 사건들.
그런 건 딱 질색이었다. 제 손바닥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케일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나마 지금 케일이 있는 곳이 <희망과 모험을 사랑하는 여관>이라는 게 위안일까. 론 몰란, 그 노인네라면 최한만큼은 아니더라도 케일이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
아니, 아니다. 케일은 자신이 왜 동대륙까지 왔는지 기억해냈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다. 표면적으로는 이미 끝난 전쟁이지만, 케일은 더 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피는 최소화하겠지만 적어도 ‘암’들을 압박할 정도의 무력은 갖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더군다나 최한은 평균 9세즈를 제외하면 케일의 유일무이한 최측근이었다. 그의 빈자리를 대신할 일행은 없었다. 주인공이면서, 영웅이 될 존재면서, 언제나 자신의 말에 “케일 님!”하고 따르는 소드 마스터….
“좋아.”
생각 정리를 마친 케일이 고개를 들었다. 살랑 흔들리는 붉은 머리칼을 남김없이 쫓는 칠흑 같은 눈동자. 케일과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이는 최한의 뒤로 강아지 꼬리 같은 것이 보이는 듯했다.
“일단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없으니,”
“….”
“허튼짓 하지 말고 쉬기나 해.”
어차피 해결할 방도도 없을 것 같으니까. 케일은 뒷말을 삼켰다. 앞으로 최한이 맡게 될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지금은 충분히 쉬면서 오러를 회복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 케일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케일 님을, 지켜드려야 하는데.
이래서는 오히려 케일이 저를 지켜주는 모양새가 아닌가. 저를 신뢰하고 안위를 신경 써주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별개로 최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최한의 머리 위로 축 쳐진 강아지 귀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왜 저래?’
쉬라고 하는데도 여전히 표정이 어두운 최한이 케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저러면 딱 호구 취급 받기 좋을 텐데, 쟤도 참 사서 고생이다. 고룡 에르하벤이 들으면 ‘이런 박복한 놈’이라며 혀를 찰 생각을 잘도 하는 케일이었다.
“위급 시에는 라온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렇다, 최한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냐아아옹. 회색 고양이 온이 저희들을 잊지 말라는 듯 울음소리를 내었다. 빨간 고양이 홍은 최한의 다리에 머리를 부볐다.
케일, 그리고 평균 9세즈의 말에 복잡한 심경이 된 최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대답했다.
“네, 케일님!”
그리고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훈련을 마저 하겠다며 방을 나섰다. 최한이 어떤 생각인지 모르는 케일은, 그저 오러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무엇일지 에르하벤 님께 물어봐야겠거니, 하고 있었다. 힘차게 대답하는 최한은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그때, 투명화한 라온의 목소리가 케일의 머릿속에 울렸다.
-하긴 요즘 최한이 이상하기는 했다!
“뭐?”
-약한 인간은 못 느꼈나?
느끼다니…. 케일의 수준으로 최한의 변화를 알아채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케일은 타인의 변화를 빠르게 눈치챌 만큼 예민한 이도 아니었다. 당황한 기색의 케일을 아랑곳 않고 위대한 용은 말을 이었다.
-최한의 힘이 한 곳에 묶여있다! 무언가가 막고 있는 것 같다!
라온의 말을 듣고 나니 케일도 짚이는 구석이 몇 가지 있었다. 종종 미간을 찌푸리며 저를 노려본다든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몇 번 쥐었다 핀다든지. ‘나를 한 대 치려고 그러는 건가?’싶어 괜히 쫄기도 했던 케일은 그제서야 최한의 안에서 무언가가 잘못 작동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거 알고 있었으면 진작 말해 달라고.”
-응? 안 물어봤지 않나!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작은 날개를 팔랑거리며 당당하게 대답할 라온의 모습이 안 봐도 뻔했다. 케일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마른 티가 여실히 느껴지는 손가락 틈새로 케일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라온, 에르하벤 님께 영상 통신 연결해줘. 그 말에 라온이 되묻는다.
-응? 금룡이는 왜 그러나?
“왜긴 왜야, 최한의 힘을 막고 있는 게 뭔지 알아내야지.”
나의 주인공을 막고 있는 바로 그 ‘무언가’를.
***
“…내가 대체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그건 내가 할 말이다. 공자님의 지시니 잔말 말고 먹기나 해.”
탁, 소리가 나게 접시를 내려놓은 비크로스가 체념이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비크로스의 차가운 눈빛과는 달리 최한의 앞에는 그가 만든 만찬들로 한가득했다.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 과연 헤니투스 가의 주방장다웠다.
그러나 그 만찬의 주인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식기들이 부서져라 노려만 보고 있었다.
‘공자님이 보시면 까무러치시겠군.’
케일 앞에서 순한 대형견 흉내에 여념이 없던 최한이 떠올라 입가에 조소를 띄우는 비크로스였다.
한편, 최한은 최한 나름대로 자신을 <희망과 모험을 사랑하는 여관>에서 헤니투스 저택으로 보낸 케일의 저의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케일 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성과도 없이 훈련을 끝마친 최한을 기다리고 있던 텔레포트가 떠올랐다. 중대한 사안을 앞두고 볼 일이라도 생긴 건지 여쭙는 최한에게 케일은,
“나 말고, 너.”
라는 말과 함께 그를 이곳으로 보내버렸다.
“비크로스한테 미리 말해놨으니까, 거기서 먹고 자고 쉬기나 해.”
케일은 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식사는 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을 유행시킨 전적이 있었다. 그렇다 한들 이는 너무 과하게 신경 써주는 것 아닌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식사에 최한은 어렸을 적 한국에서 들은 ‘음식 남기면 가는 지옥’이 이런 곳이겠거니 실감했다.
끔찍하군, 최한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만찬을 즐기는 이가 케일 님이셨다면 좋았을 텐데. <희.모.사>를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케일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식사는 잘 하고 계실까? 다른 이들을 신경 쓰느라 제 건강은 돌보지 않을 케일이 눈앞에 선명했다.
‘케일 님….’
아, 또다. 케일을 생각하자 최한의 손바닥이 저릿해졌다. 왼쪽 손을 거의 쓰지 못할 정도로 온몸에 힘이 돌지 않았다. 답답하다는 듯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쿵, 쿵, 쿵. 자꾸만 거슬리는 이 심장 소리가 막혀버린 오러와 관련 있는 건 아닐까.
최한은 등줄기를 스치는 찌릿함에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내 몸이 내 것 같지 않아졌던 게 언제부터였지? 골똘히 생각에 빠진 그는 그렇게 한참이나 넓직한 식탁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
“식욕은 실패인가.”
론을 통해 비크로스의 보고를 받은 케일이 중얼거렸다. 최한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한 방안 중 첫 번째 작전이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케일은 에르하벤과의 영상 통신 내용을 다시 회상했다.
“속성이요?”
-“그래, 속성.”
“인간, 금룡아! 내 속성은 ‘현재’다!”
어린 용의 간섭이 있었으나 자연스럽게 넘기는 데 도가 튼 케일은 에르하벤으로부터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용만큼은 아니더라도 최한 정도 되는 소드 마스터면 속성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는 모양이군.”
“그렇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최한도 위대하다!”
“속성이라면….”
-“최한의 오러가 무슨 색이지?”
검정색, 모든 빛을 흡수하는 어둠. 에르하벤의 말에 따르면 어둠은 절망과 좌절, 상실을 의미한다.
케일, 김록수는 <영웅의 탄생>에서 최한이 어떻게 소드 마스터가 되었는지 잘 알고 있기에 고룡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물었다.
“제가 최한에게 절망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까?”
“인간, 안 된다! 최한은 착하다!”
고룡은 케일을 비웃었다.
-“최한의 힘이 어둠이라면, 어둠을 막고 있는 것은 무엇일 것 같나?”
절망을 막고 있고, 좌절이 이기고자 하며, 상실이 해소하고자 하는 것.
“욕구 말씀이시군요.”
에르하벤의 말은 그것이 전부였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케일 안의 김록수가 생각했다.
‘인간의 욕구라, 단순하지.’
생존의 욕구. 먹고, 자고, 쉬는 것.
이는 케일이 가장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최한을 헤니투스 저택으로 보낸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이상한 일이다! 약한 인간, 그거 아나? 행복은 잘 먹고 잘 사는 거다!”
“그러게. 최근 잘 못 먹고 있지는 않나 했더니 그건 아닌가 보군.”
케일이 잘못 짚은 방법에 격렬하게 동조했던 라온이 동그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식이 아니라면 뭐지? 무엇일 것 같나, 인간?”
짧은 용생을 살아온 라온은 욕구에 대해 한참이나 무지했다. 케일은 그런 라온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텔레포트를 마련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약한 인간, 어디 가나? 사과 파이 먹고 가라!”
“사과 파이는 나중에. 먹였으니 이제 재우러 가야지.”
식욕이 아니라면, 이번엔 수면욕으로 간다.
***
“케일 님,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좀….”
“뭐가 문제지? 헤니투스 가에서 가장 좋은 침구니 편히 쉬도록 해.”
어떻게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한은 딱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려 케일의 침대다. 이곳저곳 다니느라 제 집에는 썩 자주 오지 않는 케일이라지만, 그래도 케일이 누웠던 곳이라는 사실은 변함 없었다.
“…저, 케일 님. 계속 서 계실 생각이십니까?”
“너 자는 거 볼 때까지 있을 생각이었는데.”
이쯤 되면 최한이 편히 쉴 수 있게 해줄 작정이 맞는지부터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시선을 돌리면 곧바로 보이는 케일의 모습에 최한은 이내 두 눈을 꼭 감아버렸다.
새하얀 베개에, 까만 머리칼.
눈까지 감고 있으니 최한의 앳된 외모가 실감이 났다. 자신이 근무하던 곳 근처에도 고등학교가 있어 최한 또래의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등하교 하는 모습을 종종 봤던 기억이 있다. 비록 의도는 최한의 욕구를 해소해주기 위함이지만 이렇게 열일곱 살 정도의 소년이 평화롭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이불을 꼭 쥐고 있는 최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도 모른 채 지긋이 그를 지켜보던 케일은 부디 이번 작전은 성공하길 바라며 발걸음을 뗐다.
“…케일 님.”
떠나려는 케일을 붙잡은 것은 최한의 부름이었다.
“뭐야, 잠든 거 아니었나.”
“저를 두고 가시는 겁니까?”
두 사람의 말이 공중에서 엉켰다. 두고 가냐니. 어린 아이가 보채는 듯한 말투에 케일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를 고등학생으로 인식해 보았기 때문일까, 평소와 달리 무뚝뚝한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순한 그 시선이 케일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케일의 방이 적막으로 가득 찼다. 최한이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무서운 힘을 가진 주제에, 저가 곁을 떠나는 걸 이토록 겁내는 이유를 케일은 알 수 없었다.
‘가지 말라고 말도 못 꺼내면서.’
가겠다고 하는 케일을 말리지 못할 최한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케일은 어쩐지 그 사실에 짜증이 치밀었다.
“간다고 하면?”
그래서 부러 짓궂게 대답했다. 케일답지 못했다. 힘을 잃은 건 최한인데 왜 저가 조바심을 내는지. 언제나 나른하고 초연하게 굴려고 했고, 그게 천성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여기서 오러를 되찾을 때까지 케일 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반나절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기운이 쏙 빠진 최한을, 그토록 눈치 없는 케일마저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기다리고 있겠단다. 그리고 오러를 다시 쓸 수 있게끔 부단히 노력할 게 뻔했다.
‘아, 모르겠다.’
고룡이 절망이라는 단어를 꺼내서 그래. 최한이 앳된 인상이라 그래. 하필 근무지 근처에 고등학교가 있었어서. 하필 나는 <영웅의 탄생>을 읽었고. 하필 그가 경험한 상실을 잘 알고 있어서.
케일은 제 원래 자리, 즉 최한이 누워있는 침대 위에 풀썩 몸을 던졌다.
“케, 케일 님?”
최한의 목소리가 귓가에 빠르게 들어왔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도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
어차피 최한을 재우는 것 외엔 할 일도 없었다. 수면욕을 채웠는데도 오러가 여전히 오작동이면 새로운 방안을 찾아야 하겠지만 우선 자는 게 먼저였다.
심드렁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케일을 최한은 몇 번이고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그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정도라니. 평균 9세즈가 없으니 참 조용하구나 싶어 살풋 웃음이 났다. 그에 최한이 움찔하는 것이,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덕에 케일에게도 느껴졌다. 케일이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헤니투스 가의 장남보다도 더 붉은 색으로 물든 최한의 얼굴이 보였다.
욕구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순진무구한 얼굴.
‘탐욕도 많지 않고, 권력이나 부에 대한 욕구도 없는 것 같은데.’
황금패도, 귀족 지위도 욕심낸 적 없는 최한이기에 케일은 그를 꽉 누르고 있는 욕구가 무엇일지 감도 오지 않았다. 대신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라도 있나 싶어 케일은 팔을 뻗었다. 그리고 최한의 머리를 투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라온이나 온, 홍에게 종종 하던 손버릇이었다. 감정 표현이 더딘 케일이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표현 방식이었다.
“저기…?”
“그냥 칭찬이라고 생각해.”
몇 번 쓰다듬고 있으니 케일은 제 꼴이 우스웠다. 남들이 보기엔 최한이나 저나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최한이 비슷한 말을 꺼냈다.
“케일 님은 제가 열일곱 남짓한 어린애로 보이시겠지만….”
“….”
“저는 케일 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습니다.”
나도 네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 그러나 케일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설명도 힘들뿐더러 최한이 살아온 세월은 가늠할 수도 없는 깊은 늪과 같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최한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오러를 못 쓰게 되고 나서, 이유가 뭘까 많이 고심해봤습니다.”
케일이 절반 밖에 풀지 못한 문제. 최한은 자신의 문제에 어떤 답을 내렸을지 케일도 궁금했다. 쑥스러운지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는 최한을 케일은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주체가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뛰고, 힘 조절도 어려워졌습니다.
최한은 그 순간이 언제인지 알고 있었다. 케일이 라온, 온, 홍과 함께 저를 챙겨줄 때.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려 줄 때. 보호자처럼 저를 걱정하고, 끼니를 신경 쓸 때.
케일의 시선이 제게 닿을 때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동시에, 쿵. 모든 감정이 곤두박이쳤다.
‘저 분께 나는 돌봐야 할 아이일 뿐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왜 케일이 라온과 라크에게 하는 행동을 볼 때면 손에서 힘이 빠지는지 알 것 같았다.
‘공평하고 관대하신 케일 님.’
케일의 세심함은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 보호해야할 존재. 케일은 손길이 필요한 이에게 기꺼이 제 빛을 나누어주는 존재였다. 그런 부분을 좋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이 최한에겐 뼈 아프게 다가왔다.
특히 그 꿈을 꾸고 나선 더더욱.
“흐, 흐읏, 흣….”
침대에서 낑낑거리며 신음하는 케일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피를 토하고 휘청거리는 건 퍽 봐왔지만 몸을 웅크리며까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그때 목격한 것이 처음이었다.
“최, 흐읏, 최한….”
인상 깊었기 때문일까. 거듭되는 꿈 속에서 그 장면은 자꾸만 변형되었다. 이윽고 케일은 실제와 다른 소리를 내며 신음했고, 그를 울게 하는 이는 최한, 바로 저였다.
현실에서 그 꿈을 떠올리자 케일을 만지고 싶다는 욕구가 또 한 번 좌절되었다. 후, 기운이 빠지는 상체와 달리 하체에 피가 쏠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차마 케일 님을 상대로 몽정했다는 말은 꺼낼 수 없어, 저의 뺨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케일에게 대충 얼버무리는 최한이었다.
“케일 님을 생각할 때면 그냥, 그냥… 심장이 쿵쾅거립니다.”
“….”
“가끔 케일 님이 꿈에 나오면 그게 더 심해지고….”
“….”
“만지, 아니 닿고 싶은데 현실에선 그게 불가능하니 가슴께가 점점 더 답답해졌습니다.”
생각 정리를 끝마친 덕에 긴장한 속과 달리 말은 태연하게만 나왔다. 그러나 듣고 있는 케일까지도 태연하던 것은 아니었다.
잠, 잠깐. 얘 만지고 싶다고 한 거지? 그리고 꿈? 케일은 최한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종류의 욕구도 존재했다. 성욕, 때로는 색욕이라던가?
‘분명, <영웅의 탄생>은 15금이었다고.’
이것도 자신이 스토리에 개입한 결과인가. 케일은 망연자실했다. 머릿속이 침착하게, 동시에 재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최한이 오러를 못 쓰게 된 이유는 욕구가 해소 되지 않아서인데, 결정적으로 내가 꿈에까지 나오니까 그 색욕… 이라는 게 오러를 꽉 누르게 되었다는 거지.
최고치로 붉어졌다고 생각한 최한의 뺨이 이젠 케일의 머리색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케일은 액면가로 치면 이제 고작 사춘기를 지났을 소년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자리에 누운 부동한 자세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불이 볼록 튀어나온 것 같은 건 기분 탓일 거야.’
자신의 무신경함에 이토록 고통받게 될 줄이야. 김록수일 적에도 이런 일은 겪어보지 못했었다, 당연하게도.
최한은 “제가 오늘은 말이 길었죠.”하며 말을 마쳤지만 케일은 평소와 같이 어, 하고 말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무슨 말로 대답을 해줘야 할지가 막막했다. 대신 케일은 몇 번 뒤척이고서 등을 돌렸다.
‘못 들은 걸로 하고 그냥 자자.’
왕세자 알베르였다면 ‘미쳤습니까?’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 상대가 저로 몽, 아무튼 그런 걸 하는 최한이니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차라리 불경하다는 말 질리도록 듣는 게 낫지, 저 대형견 같은 최한에게 어떻게 모질게 굴겠는가. ‘모른 척 회피하기’는 케일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럼 최한은 영영 오러를 못 쓰는 건가?’
오러를 못 쓰는 소드 마스터. 그렇게 많은 판타지 소설을 읽은 김록수에게도 그런 소재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긴밀하게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케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이었다.
“…!”
뒤돌아 있는 케일의 등을 한 품에 안은 최한에, 케일은 놀랄 새도 없었다. 근육이 다 빠져 말라버린 체구는 최한에 비해 턱 없이 작았고, 영락없이 껴안긴 꼴이 된 케일은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최한의 심장 소리를 피하지 못했다.
“제가 한 말에 그, 부담이나 책임감 느끼시진 마십시오.”
최한은 제 말이 끝나자 바로 뒤돌아서 몸을 웅크리는 케일에 초조함이 앞섰다. 자신은 그냥 오러가 막힌 이유를 얼추 알았으니 최대한 빨리 해결하겠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곰곰이 되짚어보니 제 마음을 고백한 것과 다름 없던 것이다. 아차 싶었다.
“케일 님, 그러니까 저는, 그저 저를 어린 아이로만 대하지 말아달란 의미로…!”
차분하게 제 속내를 드러낸 아까와 달리 최한이 얼마나 조급해하는지 케일은 그의 표정을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버텼으면서, 무슨. 케일이 홱, 하고 고개를 돌리자 최한의 얼굴과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네가 어리긴 뭐가 어려. 난 너 어리게 본 적 한 번도 없어.”
“예?”
“그리고 넌 무슨 사람이 식욕도 수면욕도 물욕도 없어?”
“케일 님?”
“나는 네가 꾼 꿈처럼 못 해줘. 대신 눈 감아.”
케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 했지만 그가 시키는 일은 착실하게 따르는 것이 최한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이렇게 무방비해도 되나.’
후, 잡념은 여기까지. 케일은 심호흡한 뒤 모두 오러를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하며 최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희생하려는 건가?
-저게 xx 뭐가 희생이야, xxx야
-배고파…
그리고 시끄럽게 구는 녀석들의 말은 가뿐히 무시한 채,
쪽.
케일의 입술이 최한의 것과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런 유치한 짓이 얼마 만인지. 김록수 시절의 부하들이 봤더라면 기함을 했을 게 분명하다. 부끄러움에 못 견뎌하며 케일은 괜히 김록수일 적 자신을 떠올렸다.
“케일, 님?”
최한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죽고 싶다.’
케일은 딱 그런 심정이었다. 차라리 최한의 오러를 평생 묶어두고 짱돌 힘이나 빌려 쓸걸. 케일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문으로 걸어갔다.
“눈 뜨지 말고, 감은 채로 그대로 자.”
애 재우러 왔다가 별 꼴을 다 겪는 케일이었다. 그는 망나니처럼 퉁명하게 말을 던졌다. 그리고 방문을 활짝 열어서, 문이 닫히자 마자 냅다 달렸다. 케일의 발소리가 쿵쿵거렸다.
최한의 심장도 따라서 쿵쿵거렸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소음에 밤귀가 밝은 바이올란이 깨어나 지나가는 케일을 붙잡았다.
“어머, 케일.”
저택에 왔으면 말이라도 하지 그랬니. 바센과 릴리가 기다렸, 어머? 혹시 어디 몸이라도 안 좋니?
바이올란 부인의 지나친 걱정에도 케일은 차마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팔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때늦은 열병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지표란 걸 케일은 알고 있었다.
***
“약한 인간아! 최한이 다시 오러를 쓴다!”
만약 그 짓까지 했는데 오러가 돌아오지 않으면 정말 제국이고 ‘암’이고 간에 짱돌 저택에 은둔하며 살 작정이었던 케일에게 듣던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멋진데!”
“최한 최고인데!”
묘족 남매 온, 홍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냐냐 거리며 최한 주위를 어슬렁 거렸다. 라온도 모습을 드러낸 채 편하게 방 안을 휘젓고 다녔다. 어제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최한만이 멋쩍게 웃을 뿐.
‘어린 아이가 아니라더니.’
고작 입맞춤에 막혀있던 색욕이 해소될 정도라면 최한은 애가 맞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곧바로 오러가 돌아올 줄은, 입맞춤을 감행한 케일조차 확률 밖의 일이었다.
‘에르하벤 님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번엔 명백하게 케일의 손바닥 위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그는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왜 고룡이 저를 보면 항상 박복한 놈이라 하는지 케일은 아주 조금 이해가 됐다.
“약한 인간! 게다가 최한이 조금 더 위대해진 것 같다!”
“위대한데!”
냐아아옹. 평균 9세즈가 재잘거렸으나 케일은 최한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아주 대충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 대단하네.”
그리고 괜히 눈이 마주쳤다가 어색한 기류라도 흐르면 큰일이니 곧바로 방을 나갔다. 차라리 바이올란 부인을 마주하는 게 심적으로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케일의 발길을 멈춘 무언가. 바로, 항상 정확하게 들어맞는 촉이라는 것이 케일의 뇌리를 번뜩 스친 것이다.
‘지금은 이 정도로 끝났지만… 언젠가 또 최한의 오러가 막힌다면?’
안 돼, 안 돼. 생각하지 말자. 케일이 고개를 휘 내젓자, 목덜미를 덮은 적발이 따라 흔들렸다. 케일은 그건 그때가 되었을 때 처리하면 돼,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불안한 예감을 뒤덮었다.
머리카락이 케일의 새하얀 목을 간질 때마다 뒤를 훑고 지나가는 까맣고, 어두운 시선은 눈치채지 못한 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