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케일은 아주 오래된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랜 옛날로만 느껴지는 몇 년 전의, 케일 헤니투스가 되기 이전의 자신을 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어찌되었을지 모를 아득한 존재. 그래, 꿈의 정체는. 김록수, 그 안을 이루고 있는 이였다.
잿빛의 조금 넓은 단칸방에 깔끔한 싱글 침대. 잘 정돈된 이불만이 자리한 그곳은 지나치게 텅 비어 도무지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고독감이 자리잡은 단칸방을 막 나서는, 서늘한 인상과 큰 키에 단단한 근육을 뽐내어 성숙한 어른의 느낌이 물씬 나는 남자의 이름은 김록수. 그는 그의 방만큼이나 고독한 사람이었다. 김록수는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을 입고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어딘가 텅 빈 듯 했다.
김록수가 어떤 삶을 살았었나. 케일은 잠에서 깨어난 그날 아침, 론의 레몬에이드를 마시며 조용히 김록수의 삶을 회상했다.
어렸을 적부터 풍족한 것보다 모자람과 절망을 먼저 배웠던.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여기저기 맞아 다녔던. 당장에 오늘 하루를 넘기고, 내일을 살아갈 생각에 허덕이며 자란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었다. 그는 제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그 누구보다 그들을 위해 주었지만, 결국 그의 삶에는 친구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온통 칙칙하고 어두운 삶이었다. 그렇기에. 본인이 그런 삶을 살았기에 어쩌면 제 주변인들보다 제가 더 나선 것일지도 몰랐다. 다들 돌아갈 품이 있으니, 돌아갈 곳 없는 내가 나서고, 희생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세상의 밝고 희망찬 모습보다 어둡고 더러운 모습에 더 익숙했고 수많은 공포를 이겨내며 이 악물고 버티었던 김록수. 김록수는 케일에게 미련이 있는 존재는 아니었으나 그때를 생각하면 시어 죽을 것만 같은 이 레몬에이드도 씁쓸하게 느껴지는 존재는 되었다.
2. 아침에 일어날 때면 고양이 두 마리와 용 한 마리가 둥글게 몸을 말아 제 곁에 붙어 있고, 매일 아침 제 안위를 걱정하며 레몬에이드를 건네는 이와, 제가 보호하고자 마음먹은 아이들이,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려는 가족들이 있었다.
케일은 간만에 허전함을 느꼈다. 그건 온이나 홍, 라온이 어찌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아마 데르트도, 바이올란도 해결해주지 못할 부류의 것이었다. 적어도 이 세계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어찌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시간을 거슬러, 세계를 넘어, 케일 안의 김록수가 김록수였을 적부터 시작된 문제였으니.
"케일님."
제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것은 최한. 그립지 않은 고향에서 온 아이였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밥을 먹고, 잠시 책을 읽다가, 점심을 지나 복도를 거닐고 창 밖을 구경할 때까지 어딘가 멍해져 있는 케일이 걱정되는 듯 했다.
"왜?"
"아니, 그,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가 싶어서요.."
"별 일 없다, 최한. 그저 밤잠을 좀 설쳤을 뿐이야."
밤잠을 설쳤다.
김록수는 딱 그 정도였다. 악몽? 그 정도도 되지 못한다. 추억? 그건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다. 그저 밤잠을 설쳤을 뿐인 정도. 정확하게는 김록수가 아니라 김록수의 인생이 딱 그 정도였다.
아마 지금처럼만 계속 살다 보면 언젠가 그런 적도 있었지, 하며 넘길 기억이었다. 어쩌면 김록수이던 때가 꿈이 아니었나 착각할 수도 있다. ……근데 만약에 자신이 다시 김록수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케일은 다시 김록수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역시 꿈인가, 하며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케일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본인이 별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걸 홀홀 털어내고 다시 떠나간다는 건 미련이 없기 때문이고, 미련이 없다는 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고, 의미가 없다는 건.
김록수의 삶이든, 케일의 삶이든. 문득 생각나 발걸음을 멈출지언정 발목을 잡는 족쇄는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3. 케일은 무던히도 애를 썼다. 본인의 백수 생활을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전쟁이 되었든, 작고 힘없던 왕국을 제국으로 만드는 일이 되었든, 거대한 흑막을 처단하는 일이 되었든. 그렇기에 전쟁이 끝났을 때 케일은 본인이 정말로 푹 쉴 수 있겠다 생각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군."
"그러게요. 이제야 진정 발 뻗고 자겠군요."
알베르의 집무실 안 큼지막한 침대에서 알베르와 케일이 껴안은 채 누워있었다. 남이 보면 까무러칠 모습이지만 둘은 아무런 자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케일만 자각이 없는 듯 했다. 알베르가 케일을 껴안은 채 침대에 눕고 베개에 기대 쉬어도 별 말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였을까. 알베르가 케일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알베르는 케일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 그저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 전장 한복판에서 끌어안고 있을 때조차 알베르의 심장은 쿵쿵대며 존재를 알렸다.
어쩌다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되어서. 행여나 네가 나를 받아주어 너도 나를 좋아하게 된 미래를 꿈꾸고 있다.
무심하게도, 케일은 알베르의 품 속에 안겨 주먹 가득히 포도 알을 들고 하나하나 입에 넣고 있을 뿐이었다.
"케일."
"예, 전하."
"그대는 왜 연애하지 않지?"
"그야 뭐, 전쟁 동안은 할 틈도 없었단 거 잘 알지 않으십니까?"
"그렇지만 이제 끝났지 않나."
"그래도 할 생각 없습니다."
"흐음……"
케일을 내려다보는 알베르의 눈빛이 묘해졌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애매모호했다. 마음에 둔 이가 없음은 안심이지만 저 또한 마음에 두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슬펐고, 경계심 없이 저에게 안겨 있음은 반가운 일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도 경계심 없이 안겨있을까 불안도 했다.
"케일,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와 같이 하는 것처럼 이리 안겨 있나?"
"참 내, 저하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저를 안고 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만. 그럴 틈도 없고요."
"그럼 다행이고."
"예?"
"아니, 아닐세."
"시시하네요. 저하, 거기 있는 포도 좀 더 주십시오."
불경하긴. 알베르는 살짝 코웃음 치며 손을 뻗어 침대 옆 탁자에 있는 포도를 떼어 주었다. 아무렴 어때. 자신은 이대로도 만족했다. 케일에게 이럴 수 있는 자가 자신밖에 없다면야, 뭐. 물론 더 나아간 관계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으나 이 관계와 상황에 만족한다는 것 또한 진심이었다.
솔직히 말해, 케일의 심장도 요 며칠부터 알베르와 붙어있으면 콩, 콩 뛰었다. 처음에는 의문을 가졌으나 곧 알기를 그만두었다. 도대체 자신의 심장이 왜 그러는지, 그 기분과 감정이 뭔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알면 무척이나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에 케일은 조용히 눈 감았다.
4. 케일은 늘 무덤덤한 얼굴을 띄었다. 간혹 돈을 생각하거나, 쉬거나, 무엇인가 지킬 때만큼은 얼굴에 작은 변화들이 일었지만 그마저도 무심한 듯한 느낌이 있었다. 누군가는 나른하다 말 할 얼굴이었다.
온과 홍, 라온과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며 간식거리나 작은 물품들을 사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여기저기서 케일을 알아보는 일이 즐비했기에 케일은 늘 칙칙한 암갈색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오로지 부담스럽고 귀찮다는 이유였다. 때문에 케일은 잘 나가지 않으려 했으나 이 작은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도 신나는지 자꾸만 케일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여행가자 조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케일은 피곤하고 귀찮아하는 기색을 비치면서도 그것을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따라가 주었으며 간혹 바센과 릴리를 위한 물건도 사왔다. 물론 그 둘 말고도 저택 안의 사람들은 케일에게서 받은 작은 선물이 하나쯤은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모두 보물이 되었다.
바센의 보물은 케일에게 받은 펜이었다. 쓰면 닳을까 스치면 다칠까 염려되어 잘 쓰지도 못하는 보물.
릴리의 보물은 케일에게 받은 검이었다. 쓰다 깨질까 베다 무뎌질까 두려워 특별한 날에만 쓰는 보물.
라온의 보물은 케일에게 받은 이름이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당당하고 뿌듯하여 온 세상에 널리 알려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내 이름은 위대한 라온이다" 하며 항상 외치고 다니는 소중한 보물. 그건 닳지도 잃을 걱정도 없었다.
온과 홍의 보물은 케일에게 받은 금화였다. 때문에 둘은 보물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안심했다. 아직 케일은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다.
"인간! 인간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나?"
"……내가?"
케일은 라온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나야 뭐, 많지. 너희들도 소중해."
케일은 곧 표정을 덤덤히 바꾸고는 그렇게 답했다. 또 아이들끼리 무언가 말이 오갔겠거니- 하고 넘길 뿐이었다.
라온은 소중한 것이 보물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케일의 보물이라 알아들었다. 그렇기에 라온은 그 말에 기뻐하며 저택 안을 방방 돌아다녔고, 그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동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케일만이 이 사람들이 또 왜이래- 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검은 용은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단지 소중한 것과 보물은 달랐다. 그리고 단순한 보물과 진정 목숨만큼 아끼는 보물은 달랐다. 때문에 케일에게 네 보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는.
5. 또 그 꿈이다. 김록수의 꿈. 이번에는 전보다 더 생생하고 현실감 있었다. 꿈 속에서 케일이 다시 김록수로 돌아갔다.
케일, 아니 록수는 조금 이른 시각 자신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가 새벽 5시를 가리켰다. 록수는 이불을 걷고 부엌으로 걸어가 냉수부터 한 잔 들이켰다. 거칠고, 크고, 조금 투박한 손이 김록수의 것이 맞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출근할 준비를 마친 채 현관 앞에 섰다. 으레 꿈이 그렇듯 한 두군 데 빼먹고 판단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아도 위화감은 없는 법이었다. 조금 오래되어 보이나 멀쩡한 구두를 신고 밖에 나오니 거리는 출근하는 이들로 붐비었다. 록수 또한 그들의 틈에 섞여 지하철을 타고, 평범한 회사원인 마냥 회사로 출근했다. 실상은 평범한 회사도, 평범한 회사원도 아니었지만.
"……팀장님?"
"팀장님?"
록수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마자 눈이 벌겋게 충혈된 부하들이 록수를 애타게 부르며 다가왔다. 하나같이 얼굴이 퉁퉁 붓고 눈이 충혈된 것이 며칠 밤낮 울면서 밤을 샌 것 같았다.
"어디 계셨습니까? 갑자기 사라져서, 흑,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러게 허구한 날 책이나 읽지 마시고 사람들과 좀 놀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사적으로 연락이 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까?!"
"어딜 가면 간다, 말이라도 해주셔야 할 꺼 아닙니까? 저희는 팀장님이 혹시나 돌아가신 줄 알고 얼마나..!"
얘네가 대체 왜이래? 록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제게 달라붙어 엉엉대는 부하들을 떼어냈다. 다 크고 징그럽게 근육까지 키운 것들이 달라붙으니 전혀 귀엽지 않았다. 달라붙어 귀여울 만한 건 라온과 온, 홍, 최한이나 알베르 정도가 다였다.
"팀장님.. 저희한테도 좀 의지해주시면 안될까요?"
"왜 항상 혼자 다 하시려고 하는 거에요?"
그야.. 당연했다. 록수는 돌아갈 곳이 없었고, 그들은 돌아갈 곳이 있었다. 록수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만, 그들은 죽으면 슬퍼하고 아파할 이들이 있으니까. 그렇다면야 차라리 자신이 다치는 게 나았다. 록수는 그들을 뒤로한 채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직도 올망졸망 저를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책상 위엔 평범해 보이나 그렇지 못한 서류들이 한 가득 쌓여 있었다. 서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간단한 프로필과 정보들이었다. 혀를 차며 하나씩 넘겨보고 있던 차, 갑자기 알베르 크로스만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이 인간이 왜..?'
멀끔한 슈트 차림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잘생긴 얼굴은 금발에 청안을 가진 백인이 아니라 검은 머리카락에 어두운 피부를 가진 이였다. 심지어 이름과 나이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멍하니 서류를 응시하고 있을까, 일순간 주변이 환해지며 알베르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예?"
습관적으로 나온 경어였다. 알베르는 서류에서 보았던 모습이 아닌, 늘 보았던 황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돌아갈 곳도, 가족도 있는 지금 말일세. 지금도 그대가 희생하는 게 낫나?"
록수는 제 손을 내려다 보았다. 투박하고 거친, 자신의 것이 맞았다. 케일 헤니투스라면 모를까 김록수라면 돌아갈 곳이 없었다.
"김록수 말고, 자네 말이야. 케일 헤니투스"
록수가 다시 제 손을 내려다 보았다. 희고 고운, 케일의 손이었다. 가슴팍까지 내려온 빨간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다시 김록수가 되면, 내가, 우리가 그립지 않겠는가?"
며칠 전, 케일은 꿈을 꾸었다. 김록수가 삭막한 단칸방에서 출근을 하려는 모습을 보았다. 그 날 깨달은 것은 자신이 어디든지 별로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록수로서의 삶이든 케일으로서의 삶이든 별로 미련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미련이 없다라?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도 그립지 않겠군."
"그건.."
아니다. 그리울 테였다. 사무치게 그리워 밤잠 설칠 정도는 아니겠으나, 가끔가다 삶이 힘들어지고 지칠 때면 떠오를 얼굴들이 분명 있었다. 길고양이만 보아도 온과 홍이 생각날 테고 용이 나오는 영화 포스터만 보아도 라온이 생각날 것이다. 하교하는 남학생만 보아도 최한이, 잘나고 멋진 지도자만 보아도 알베르가. 다정하게 걸어가는 부부를 보고 데르트와 바이올란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애써 케일로 돌아가려 발악을 하진 않을 것 같으나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 것 같았다. 다시 김록수로 돌아온 게 불만이진 않겠으나 이럴 거면 차라리 케일도 되게 하지 말지. 라며 자신을 케일로 만들었던 이를 살짝 원망할 것 같았다. 위험했다.
다시 공간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이번에는 케일 헤니투스가 서 있었다. 자신의 케일이던 때보다 키는 조금 작을지언정 몸 곳곳에 붙은 어깨와 짧게 잘린 붉은 머리칼의 케일 헤니투스가.
"젠장, 내 몸을 볼품없이 만들었군. 그렇게 말라 빠져서 뭘 하려고."
"어.."
"내 몸을 가로채 갔으면 좀 책임을 지어야 하는 거 아니야? 허구한 날 피 토하고 주변 걱정시키고. 도대체가.. 그래서야 다시 그 몸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사라지는 구만."
눈 앞의 케일은 쉴 새 없이 불만을 토로하다 비뚜름한 시선으로 케일을 바라보았다.
"미련이 있다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지금의 삶에 의미를 두고 있는 거겠지.""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야."
케일은 얼이 빠져 눈 앞의 케일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케일 헤니투스가 사라졌다.
다시 눈앞이 새하얘졌다. 조금 전 등장했던 알베르와 케일이 거짓이었다는 듯 사무실로 되돌아 왔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정말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아니, 아니. 괜찮아."
김록수는 고개를 휘저으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갖다 대었다. 서류에는 알베르 크로스만이 아닌, 모 기업의 간부가 올라 있었다. 그렇다면 방금 그건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김록수의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나.
'쯧. 어지간히도 그리웠나 보군.'
록수는 그리 생각하며 종이컵에 따라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믹스커피를 들이켰다. 전혀 뜨겁지 않았다.
6. 꿈을 꾸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있다. 그건 바로 꿈에서 깨는 일이었다.
케..님… 일..님..!"
아까의 환했던 빛과는 또 다르게 갑작스레 쏟아지는 빛,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에 록수가 눈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어?'
어깨로 흘러내리는 붉고 긴 머리카락, 희고 고운 손, 고급진 내부와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이들. 다시 케일이 되었음을 알았다.
케일님! 괜찮으십니까?"
"약한 인간! 왜 그러나, 어디 아프나?"
"울고 있는데!"
"눈이 빨간데!"
라온과 온, 홍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저에게 달라붙었다. 최한도 얼굴을 찡그리며 케일에게 가까이 달라붙었다.
"도련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어? 아니.. 괜찮아."
론이 걱정과 우려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제게 물어왔다. 대체 왜 이러지? 그저 자다 일어난 것뿐인데.
"그치만 케일님.. 울고 계셔서요."
"어? 아.."
그제야 케일은 눈물이 제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꿈이 그리도 슬펐다? 전혀 슬프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그립고 짠한 느낌과 흐르는 눈물이 불쾌했다.
"인간, 울지 마라.. 우리가 잘못했다."
"아니, 너희가 왜.."
"그 동안 많이 힘든 것 같았는데!"
"어제도 정신 없어 보였는데!"
괜한 자책을 하며 평균 9세들이 더 달라붙어 오는 게 퍽 귀여웠다. 그래, 달라붙어 귀여운 건 그런 떡대들이 아니라 온, 홍, 라온.. 뭐 최한이나 알베르 정도지. 잠시만 알베르? 알베르가 거기서 왜 나와?
온과 홍, 라온은 그럴 수 있었다. 작고 귀엽고 아직 어리니. 좀 귀찮을지언정 절대 징그럽진 않을 것이다. 최한은, 최한은.. 물론 키도 크고 몸도 크긴 했지만 아직 어리니 귀여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알베르는... 다 큰 놈이 울면서 저에게 안기는 게 뭐가 귀엽다고? 하지만 정말로 알베르가 울면서 저에게 안기는 걸 상상하자, 상상하자.. 미친. 징그러울 게 분명한 그 장면이 왜인지 귀엽게 왜곡되었다.
아니야. 근육이 없으니까? ...한 나라의 왕태자가 근육이 없으면 그것도 이상했다. 게다가 이젠 황제다. 근육 빵빵한. 얼굴이 잘생겨서? 그렇지만 '귀여운 얼굴'이라고도 볼 수 있나? 전혀. 물론 잘생기면 장땡이지만.. 그렇지만 알베르의 얼굴은 누가 봐도 선이 딱딱하고 어딘가 거친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왜? 케일은 꿈도 뒤로한 채 혼란스러운 정신을 수습했다.
'설마.. 미친.'
그간 외면해왔던, 무시해왔던 감정이 심장을 찔러대었다.
7.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만약 자신이 진짜로 김록수로 돌아간다면 어떡하지. 진짜 케일이 현재의 상황에 적응이나 잘 할 수 있을까? 만약 김록수로 돌아간 자신이 이들이 너무 그리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아니, 안되었다. 적당히 그리워하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그것으로 자신의 일이 방해 받으면 안 되었다.
"저하, 만약에.."
"음?"
"만약에 제가 사라진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군. 어디론가 사라질 것인가?"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괜한 소리 하지 말지. 상상하기도 싫으니."
상상하기도 싫다, 라.. 조금 감동적인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티 낼 일은 없었지만.
"저하는 연애 안 하십니까?"
"그건 내가 전에 했던 질문 같은데."
"그러니까요."
"나도 아직 할 생각이 없네."
그렇군. 케일은 조금 안도하며 알베르의 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간 별 생각 없이-있더라도 무시하며 했던 이 자세가 조금 부끄러우면서도 좋았다.
"오늘따라 적극적이군."
"뭐가요."
"그 동안은 안겨만 있었는데 말이야."
케일은 작게 입을 삐죽이며 알베르를 더 끌어안았다. 그거야 당신을 좋아하는 지 몰랐으니까요. 하고 속으로만 대답하며.
반면 알베르는 미칠 거 같았다. 본인이 어떻게 참고 있는데. 당장에 끌어 안고 사랑한다 말하며 입 맞추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건만.
혹시나 당신도 나를 좋아하고 있을까. 케일과 알베르는 같은 마음으로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를 더 끌어안았다.
8. 케일인 자신의 마음을 절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 진짜 케일 헤니투스가 돌아왔을 때 혼란스러울 것을 방지하기 위함도 있지만, 동시에 언젠가 김록수로 돌아갔을 때 상처받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
케일이 더 딱딱해졌다. 이제 더 이상 알베르의 품에 안겨 쉬는 일 따위 없었다. 알베르를 만나러 가는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었고 영상 통신구를 받는 태도도 딱딱해졌다. 최근 들어 하도 케일을 불러대는 알베르 탓에 케일과 함께 있을 시간이 줄어들었던 이들은 좋아했지만, 동시에 자신들에게도 딱딱해진 케일을 보자 좋아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왜 저러는 거지?'
라온을 내려다 보는 케일의 표정이 묘해졌다. 요즘 들어 왜인지 기분이 좋아진 듯 하다가도 갑자기 안절부절 못하더니 이제는 토라졌다. 그건 온과 홍도 마찬가지였다. 최한은 여전히 안절부절 못했고 론은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듯 했다. 심지어 어제는 디저트도 없었다. 다만 비크로스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왜 이래?'
그 이유를 알 턱이 없는 케일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동시에 차라리 다행인가 싶기도 했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조금 서운하겠으나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닐까. 더 이상 로브를 뒤집어 쓴 채 시장 바닥을 헤맬 일도 없을 거다. 귀찮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져 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참다 못한 라온이 나섰다.
"인간! 요즘 왜 이러나!"
"뭐?"
"요즘 인간의 태도가 이상하다. 우리랑 잘 놀아주지도 않고 태도도 맘에 안 든다!"
그것 때문이었나. 케일은 흠.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무 극단적으로 판단해 관계를 흐린 것일 수도 있으나 만일 자신이 김록수로 돌아가고 본래의 케일이 다시 돌아온다면 이게 맞는 일일 것 같았다. 너무 정을 들여 버리면 그리워하느라 아무것도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온."
"응?"
"만약에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넌 어떡할 거야?"
"왜 그러나 인간! 어디 아프나? 아니면 무슨 일 있나?"
"아니. 그건 아닌데.. 갑자기 내가 사라지거나 변하면 어떻게 할거야?"
"인간.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라. 인간이 사라질 일은 없다! 위대한 라온 미르가 그런 일은 없도록 만들겠다! 그리고 갑자기 변해도 괜찮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
"...그래."
케일은 계속 왜 그러나? 라며 엉겨 붙어 오는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품에 안겨 쫑알대던 라온도 오랜만의 손길에 금새 조용해져 얌전해졌다.
'그렇지만 마냥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직접 겪어보는 것은 다르지.'
9. 너무 현실적인 꿈을 꾸고 나면 따라오는 의문이 있다. 나비의 꿈. 꿈 속의 일이 정말 현실이 아니었을까.
"뭡니까."
케일은 조금 부루퉁하게 물었다. 망할 왕세자, 아니 황제. 할 말이 있으면 영상 통신구로 할 것이지 굳이 황궁까지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일부로 얼굴 보는 것을 피하고 있었건만. 게다가 집무실도, 응접실도 아니고 굳이 침실로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로운 왕국이 로운 제국이 된 이후, 넓어진 영토에 수도와 황궁의 위치를 바꾸자는 말이 계속 오갔다. 그러나 알베르 크로스만은 끝까지 이곳을 수도로 할 것임을 고집했고 황궁의 위치 역시 바뀌지 않았다. 물론 전보다 더 화려하고 거대해졌지만 말이다. 알베르의 침실 역시 붉고 화려한 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내가 왜 불렀을 것 같나?"
모르겠는데요. 케일은 속으로 그리 답하며 이놈의 황제가 또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생각했다. 아니면 자신이 무얼 잘못했나. 전쟁이 끝나고 좀 편히 쉬려고 했더니만 또 무슨 일이 터졌나.
"요즘 왜 황궁에 자주 찾아오질 않지?"
"그거야.. 로운을 넘어 대륙의 태양이 되신 저하께 방해가 될 까봐.."
"허튼 소리 말고."
"쳇. 그냥 좀 넘어가 주시면 안됩니까?"
설마 황제가 그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조금 차근차근 끊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다가는 금새 감정에 휩쓸려 절제하려 해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케일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황제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어..?'
설마. 자신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헤니투스 가(家)의 상징인 황금 거북이가 황제의 방에 있을 리가. 비록 크기도 작고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모르겠으나 케일의 엄지 손가락 만한 황금 거북이는 탁자 한구석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건…'
익숙한 브로치다. 케일의 엄지손톱만 한 루비가 정교하게 세공 되어 백금으로 잘 꾸며진 그것은 전쟁이 끝나고 훈장을 수여 받으며 알베르가 하사한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브로치가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저건 케일의 것이 아니라 케일의 것과 같은 다른 브로치였다.
"케일."
"…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무슨 일이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만."
"그럼 요즘 왜 날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지?"
"제가 그랬습니까?"
"모르는 척 말게나."
케일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간 황제랑은 너무 많은 걸 공유한 탓에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었다. 만약 속고 속인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닌 그저 일종의 연극이었다. 둘은 눈만 바라보아도 서로를 알 수 있었으니까.
"저하. 그나저나 왜 저희 가문의 상징이 저하의 침실에 있습니까?"
"음? 그야 자네가 로운을 제국으로 만든 일등공신 아닌가. 그러니 자네 가문의 상징을 두었지."
"그럼 저 브로치는 왜 있는 겁니까?"
"그것도 마찬가지로.."
"거짓말 하지 마시고요."
알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경한 놈. 하지만 그런 점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지금은 그 불경함과 눈치를 좀 집어 넣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공자야 말로 말 돌리지 말게. 요즘 왜 그랬던 거지? 정말 어디 아프기라도 하나?"
"아니, 아닙니다."
"그럼?"
"저하."
케일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덩달아 알베르의 자세 역시 진지해졌다. 정말 어디 아픈 건가?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어디서 사고가 터진 건가? 긴장감이 알베르를 감돌았다.
"저하. 혹시 만약에 제가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바뀌면 어떨 것 같습니까?"
"…뭐?"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거나."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아니면 혹시.."
"아뇨. 별 일은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괜한 걱정이군. 그래도 만약 자네가 사라진다면 내 약속하지. 목숨을 걸고 온 대륙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내지."
허세 부리기는. 케일은 살짝 코웃음 치며 눈을 흘겼다. 그러나 그것은 비아냥과 조롱보다는 귀여워하는 것에 가까웠다. 어차피 만일 자신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 이 세계에선 찾을 수 없을 텐데도 그리 말하는 알베르가 퍽 귀여웠다.
"만일 제가 바뀌어 버린다면요? 성격도, 행동도, 말투도 완전히 사라지고 기억도 오락가락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자네는 자네일 텐데도."
"아니요. 저여도 제가 아닌 겁니다. 겉은 같을지 몰라도 알맹이는 완전히 다른.. 뭐 그런 상황이요."
"상관 없네."
"네?"
"상관 없다고. 대체 자네가 무엇을 그리 걱정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만약 자네가 바뀌어 버린다고 해도 걱정 말게. 자네가 다시 원래의 자네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네."
이 역시 직접 겪어보지 않는다면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리 말해주는 황제가 고마웠다.
"그런데 나는 왜 공자가 그런 질문들을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겠군."
"…며칠 전에 꿈을 꿨습니다. 제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꿈을요."
"그래서?"
"그런데.. 괜찮았습니다. 굳이 저하나 다른 사람들이 없었어도. 그래서 다른 이들도 제가 없어도 괜찮을까 싶어서요."
알베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케일 자네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사라지면 위태로워 질 사람이 한 둘이 아니야."
물론 나도 그렇고. 알베르는 쓸데없는 뒷말을 삼켰다. 눈 앞에 있는 제가 짝사랑하는 이는 덤덤하고 무심하고 귀찮아 하는 게 눈에 보이면서도 늘 상상 이상의 것들을 만들고 생각해 내었다. 그렇다고 설마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
자신을 걱정하고 사랑해주는 일이 그렇게 만다는 걸 본인만 몰랐다.
"자네는 예전부터 그랬어. 전쟁 때도 그랬네만 주변을 믿지 못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저는 누구보다 아군을 믿었는데요."
세상에 소드마스터와 용을 안 믿으면 누굴 믿어. 케일은 상상만해도 듬직한 이들을 떠올렸다. 물론 그중에는 알베르도 있었다.
"아무튼 그렇다면야. 좀 더 주변을 믿어줬으면 좋겠군."
"여기서 더요?"
"내가 볼 땐 아직 한참 부족해. 당장 이번만 해도 그렇고. 그런 쓸데없는 걱정으로 나를 피해왔던 거라면 정말 괘씸해지는데 말이지."
"…뭐 별로 상관 없지 않습니까."
"상관 없기는. 내가 공자를 얼마나 아끼는데."
알베르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케일을 보았다.
"그런가요."
"물론. 주변인들도 그렇겠지만 나도 공자를 많이 좋아하고 있어. 사라져 버린다면 울면서 찾을 거고 변해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지. 물론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옆에서 계속 지켜주겠네."
"…저하, 방금."
그거 엄청 고백 같았는데요.
정적.
말을 뱉었던 알베르의 얼굴도, 들었던 케일의 얼굴도 홧홧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토마토라 하여도 믿을 만큼 얼굴이 붉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속내를 알 수 있는 사람. 잠시, 확인의 시간이었다.
10. 으리으리한 황궁 안, 붉은색과 금빛으로 꾸며진 화려하고 고급진 침실 안에는 두 연인이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연인이 된지 불과 오 분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세상에서 제일 애틋한 한 쌍이 되어 있었다.
"저는 제가 짝사랑인줄 알았는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만."
알베르가 고개를 숙여 케일의 이마에 입맞췄다. 새하얀 얼굴에 양 뺨을 발그레하니 붉히고 있는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케일은 얌전히 알베르에게 안겨 있었다. 역시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그저 꿈속에서 김록수를 보고 그로 돌아간 삶을 상상해 본 것과 정말 잠시 꿈속에서나마 김록수로 살아본 것은 천지차이였다. 케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훨씬 더 깊게 케일 헤니투스의 사람들을 좋아하고 있었다.
감정을 절제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는 것임을 이제야 알았다. 이미 너무 깊이 빠져버렸고, 헤어나오기엔 너무나 멀리 왔다. 그저 이렇게, 계속.
알베르가 케일을 놓더니 순식간에 위로 올라탔다.
"지금 이게 무슨,"
"날도 많이 어두워졌고, 침대도 있고, 사랑하는 이들끼리 모이면 무얼하겠나."
"…변태 같군요."
"어차피 좋으면서."
"흥."
더 이상 절제할 필요 없는 욕구와 사랑이 밤새 가득 꽃피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