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해의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그 날의 햇볕은 유난히 따가웠다고, 그는 떠올렸다. 정수리를 달구는 뜨거움과 땀에 들러붙는 눅눅한 셔츠와 발가락 사이사이를 죄는 텁텁함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그는 깊은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어디서 시원한 폭포가 쏟아졌으면 좋겠다. 샘이 솟듯, 차가운 물이 터져 나왔으면. 누구나 우스갯소리로 한 번 쯤은 빌어 봤을 사소하고 간절한 바람이었다.
아직 소년이었던 그는 사랑하는 부모의 귀애 속에 자란 선한 아이었고 두 부모의 기대를 져본 적 없는 착실하고 똑똑한 아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당신의 작은 조약돌 같은 소년의 바람을 신이 들었을 지도 몰랐다. 어쩌면 저를 찾는 너의 목소리를 에워싼 온 세계가 들었던 것일지도. 어느 쪽이든 소년은 지금을 자연스레 이해했다. 막 편의점 문을 열려던 그는, 땅 속을 뚫고 터져 나온 차가운 지하수에 흠뻑 젖으며 보이지 않는 손이 제 뒷목을 당기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아, 이건 내가. 나의.
하수도 폭파 사건은 더운 날씨와 노쇠한 시설로 인한 재해였다는 결론으로 대충 마무리 되었다. 때 아닌 물난리에 주변 상가가 뒤집어졌지만 요행히 기세를 죽인 물줄기에 피해를 입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앵커는 보도했다. 뒤이어 찬물을 뒤집어쓰고 파랗게 질린 얼굴로 더듬대며 인터뷰를 하는 소년이 나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시설 점검을 제대로 하는 건 맞냐며 상가 주민들은 숙덕거렸고 곧 잠잠해졌다. 17살이 되도록 부모에게 비밀이 없던 소년은 그 날 처음으로 거짓말을 해야 했다.
세상에 에스퍼의 존재가 알려진 건 그로부터 3개월 뒤였다. 국가, 인종,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출현한 에스퍼들은 기이한 현상, 현대 과학의 법칙을 벗어난 크고 작은 사건의 중심에 서있었다. 랜선 으로 빽빽하게 연결된 사람들은 재빨리 소문과 증거 영상 따위를 수집해 날랐으며 혼란을 중재하려던 각 국의 노력도 빠르게 허사가 되어버렸다. 인류의 오랜 상상이 현실이 된 것에 세계는 놀라워했다. 신기함에 부러움 반, 의심 반이 뒤섞인 호기심을 가졌다. 신의 은총이니 진화의 산물이니 하며 신비한 일을 찬양하는 무리도 생겨났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낯선 것을 배척하고 익숙한 것을 지향하는 그런 두려움이었다. 혹은 미지의 존재나 증명 되지 않는 현상을 신뢰하지 못하는 두려움일까. 만약 힘을 가진 자들이 부당한 마음을 먹는다면? 무심코 일으킨 사고에 우리의 안위가 위험해진다면? 그들이 스스로를 제어하거나, 감당하지 못한다면? 불붙은 불안이 빠르게 번지자 사람들은 그들을 특별히 여기면서도 어서 원인을 밝혀 문제를 해결하길 바랐다. 그들이 다시 평범해져 불안을 해소하길 원했다. 뜨거운 주목을 받았던 에스퍼들은 그렇게 사회의 외각으로 떠밀리고 있었다. 터질지도 모르는 폭탄을 무리에 둘 수 없으니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영특한 아이였던 그는 숨을 죽였다. 들켜서는 안 돼. 분명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거야. 몸을 웅크리고 제 숨소리가 비집고 나가지 않도록 틀어막았다. 소년은 좋아하던 축구를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엔 더 이상 식당까지 뛰어가지 않았다. 출발하는 지하철을 급하게 쫓지 않았으며 주말이면 친구들과 늘 가던 PC방도 가지 않았다. 부쩍 얌전해진 아들을 걱정한 부모가 조심스레 물었으나,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거라 대답하며 웃을 뿐이었다. 소년은 간절함을 갖는 게 무서워졌다. 그것이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팽팽한 줄 끝을 느슨히 쥐려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식도를 타고 뜨거운 것이 치받힐 때마다 눈을 굳게 감고, 깊게 호흡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시던 그 날의 서늘한 물줄기를 떠올리면서.
1.
최한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7시 기상 후 가벼운 조깅을 하고 아침을 먹는다. 30분 정도의 휴식시간이 포함된 아침시간이 지나면 오전 트레이닝을 시작한다. 점심 휴식 후 각종 테스트와 체크를 받고 저녁 트레이닝까지 끝낸 후 가벼운 저녁을 먹는다. 간단한 필수교육을 받으며 전날 테스트 결과를 전해 듣고, 샤워 후 취침에 든다. 취침시간은 보통 10시, 늦어도 11시를 넘지 않았다. 일주일 중 6일을 그렇게 보냈다. 외출은 허락되지 않았고 생활에 필요한 비품 등은 모두 취침 전에 요청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특별히 필요한 비품은 없었기에 최한은 무언가 요구하는 일이 손에 꼽았다. 그 중 하나가 펜과 노트였는데, 연구원의 검열을 조건으로 겨우 허가 받은 물품이었다.
쳇바퀴처럼 똑같이 돌아가는 6일이 지나가면 일요일이 왔다. 일요일 아침이면 최한은 특별히 분주히 준비했다. 식사시간까진 평소와 똑같았지만 이후 일정이 달랐다. 먼저 센터의 에스퍼들과 미팅이 있었고 점심을 먹고 나면 한 시간 정도 그와 면담을 한다. 그 후엔 줄곧 쉬면서 다음 주를 맞이했다.
탁자 위에 차분히 디바이스를 내려놓는 하얀 손을 검은 눈동자는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침묵처럼 가라앉은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x월 xx일, 오후 2시. 바이탈 체크 이상 없음. 신호, 양호. 몇 마디가 더 지나가고 무심한 눈이 저를 살폈다. “기분은.” 언제나처럼 평이한 물음에 최한은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요.”
“…그래.”
의자에 눕듯이 기대앉은 그가 늘어지듯 말했다. 그럼 시작하자.
자신이 매일 밤마다 한 면씩 채웠던 노트를 그에게 보여주고, 그는 가장 먼저 그 기록을 읽는 것으로, 면담은 시작됐다. 면담에서 오가는 대화는 대부분이 영양가 없는 잡담이었다. 한 시간의 절반 정도는 한 주를 어떻게 지냈는지, 일과에 관한 대화였고 나머지 절반은 직전에 있던 미팅에 관한 대화였다. 그마저도 형식적인 질문과 항상 비슷한 대답이었기에 드물게 지난번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대화는 십 분 정도 길어졌다. 솔직히, 최한은 그 십 분이 달가웠지만 티내지 않았다. 어떤 시간보다 떫은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가.
“피망 싫어해?”
“네?”
“맛없다고 적어 뒀기에.”
아, 그게…. 부끄러운 듯 어물대는 얼굴을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영양사한테 신경 쓰라고 부탁한 거야. 웬만하면 참아줘라. 펜으로 무언가 끄적거린 노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가 조곤이 말했다. 최한은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낯익음을 눈치 챘다. 그건 그가 짓궂은 말을 할 때의 표정이었다. 또 무언가 장난스런 말을 적은 게 분명했다.
그는 이따금씩, 아주 드물게 노트 안에다 쪽지 같은 걸 끼워두었다. 거창한 말은 아니었고 짧은 농담이나 투덜거림이었는데, 최한은 그가 그 불퉁한 말들이 기록에 남지 않길 바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추장스럽거나 불필요한 일을 못 견디는 사람일 텐데. 애초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될 일일 텐데. 그런 당신이, 필요한 일이라 여기고 있으니. 그럼으로 최한은 그 얕은 말들을 기꺼이 묻어두고 삼키기로 했다.
“라크가 많이 안정 됐네.”
“네. 이제 힘쓰는 걸 무서워하진 않습니다.”
“그래? 역시 어려서 적응도 빠른가보지. 애들은 빨리 큰다니까.”
그 말에 최한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제 나이보다 10살은 더 먹은 것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최한 자신도 꼭 손아랫사람 다루듯 대하곤 했다. 어려 보여서 그런 걸까. 최한은 9년 전부터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얼굴도 늙지 않았고 골격도 크지 않았다. 성장이 멈춘 것이다. 열일곱의 여름, 그 날부터.
그러니까 그와 최한은 따져보면 동갑이었다. 이제 해가 넘어 갈 테니 두 사람은 27살이 되겠지. 한 겨울에 태어났다던 그의 생일도 곧 이었다. 차갑고 싸늘하지만 깨끗한 눈의 계절과 붉은 색을 가진 그는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렸다. 제 앞에 앉아 소리 없이 서류를 훑는 건조한 눈을 볼 때면, 최한은 눈 덮인 설산의 고요함을 떠올리곤 했다. 마른 땅과 웅크린 생명을 모두 감싸 덮는, 혹한의 따스함 같은 것들을.
“온과 홍도 많이 좋아졌어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뭐? 내가 언제 걱정을 했다고.”
“그런가요.”
퉁명스런 표정으로 성의 없이 서류를 휘갈긴다. 아이들 모두 빠르게 나아지고 있었다. 모든 게 그의 안배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한은 8년 1개월을 되짚다가 그냥 관두었다. 이제는 어제보다 내일이, 그리고 다음 주가, 혹은 한 달 뒤가 자신에겐 더 중요하니까. 지잉. 디바이스의 타이머가 깜빡거린다. 60분을 알리는 진동이 울리자 그가 노트를 최한에게 밀어주었다. 최한, 뭐 먹고 싶은 건 없나? 깜빡한 물건을 챙기는 듯한 질문이었다. 최한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건조하게 덧붙였다. 다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싶어서. 다 같이. 같이. 최한은 차분하게 노트를 챙겼다.
“고향 음식이라던가.”
“아니요, 딱히.”
우뚝. 노트를 눌러 잡은 그가 지긋이 최한을 쳐다봤다. 붉은 두 눈이 지금 아니면 두 번은 없어, 꼭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정말 떠오르는 게 없는 데. 최한은 오랜만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럼 케일님. 순한 눈매가 쑥스럽게 휘어졌다.
케일은 일 년 전, 5년 만에 바뀐 그의 전담 연구원이자, 실장의 대리인으로써 이곳에 나타났다. 허울뿐인 실장을 쳐박아넣고 갑자기 나타난 새파란 대리인을 연구원들은 마뜩찮게 바라봤지만 케일은 전혀 거리낌 없었다. 집안에서 아주 싸고도는 도련님이라더라, 행실이 괴팍하고 정도가 없어 영국 지부에서도 손을 놨다더라, ‘그’ 헤니투스에서. ‘그’ 크로스만이. 케일은 시끄럽게 수군대는 제 뒤를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뭐…, 꼭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소문만 무성한 망나니, 그게 케일이었다.
그래서 케일은 더욱 거침없이 굴었다. 첫 날 하루를 얌전히 지낸다했더니, 다음 날 회의서부터 입 꼬리를 빙긋 말아 올리며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다들 멍청하네요. 목숨 유지할 자신도 없으면서 왜 사람을 굴린데.” 차갑게 가라앉은 회의장의 데스크 위로 두꺼운 서류철 서 너 권이 툭 떨어졌다.
“결재는 이미 끝냈으니 쓰인 지시대로 하도록. 궁금한 건 한스 부장을 통해 해결하시고.”
회의 끝났으니 각자 자리로 돌아가면 됩니다.
케일은 미련 없이 회의실을 떠났다.
그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우두커니 앉아있는 그를 케일은 거침없이 불렀다. 니가 최한이구나. 주위의 연구원이 헛숨을 삼키며 눈치를 살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고? 아. 나는 새로 온 네 담당자다.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연구원이 건네준 일지를 무성의하게 넘기던 케일은 그걸 도로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봤다. 새까만 눈동자가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침 넘기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그래서?”
“케일 헤니투스. 편할 대로 불러.”
그가 반응을 보이자 케일은 다시 제 할 말만 툭툭 내뱉었다. 요구사항 있으면 로잘린씨에게 말해. 어렵지 않은 일은 어지간히 가능하니까. 내가 좀 바빠서 매일 들여다 볼 수는 없거든. 하, 한탄에 가까운 웃음소리에 연구원의 어깨가 떨렸다. 그가 웃었다.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은 그에게 성큼 다가가 품에 쥐고 있던 것을 건네주었다. 누구 하나 말릴 새도 없이 갑작스런 행동이었다.
“… ….”
“이것도 어렵진 않은데, 종류는 정해져있어. 아무튼 너한테 넘어가는 건 다 나를 거칠 거다.”
그건 책이었다. 그에게 익숙한 언어로 인쇄된 책. 뭐해. 안 받아? 이젠 필요 없나? 케일은 굼뜬 그의 반응이 짜증스러운 듯, 아닌 듯 해 보였다.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책을 받자, 케일의 입가에 말끔한 미소가 씰룩 걸렸다. 표정 좋네.
센터는 발칵 뒤집어졌다. 당시의 실세나 다름없었던 베니온 팀장이 저 버르장머리 없는 애송이는 대체 뭐냐며 특히 열을 냈다. 팀장의 입지를 서서히 좁히고 눈앞에서 치우기까지 4개월의 공이 들었다. 더불어 쓸데없는 연구과정을 없애고 지금의 시스템을 굳히는 데도 3개월 더 걸렸다. 전 팀장의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을 꺼려했던 일부 연구원들은 조용히, 그러나 성대하게 케일을 반겼다.
분위기가 변했다. 케일은 투자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재력을 무기처럼 휘둘렀다. 재화가 곧 힘인 시대는 어느 시대나 똑같았다. 그리고 사회는 언제나 사비로 공익을 추구하는 부자에게 관대했다. 케일은 거침없지만 동시에 신중한 사람이었고,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으면서 혓바닥을 잘 굴렸다. 알아서 착각 해주신다는 데, 써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모든 건 다 아버지의 지원이자 헤니투스의 뜻일 뿐입니다.’ 양껏 선한 미소를 짓는 젊은 수장의 사진이 타임지 첫 면에 실린 것 또한 기꺼이 이용해 먹었다.
2.
“자네는 정말….”
글라스를 따라 붉은 술이 둥글게 떨어진다. 받침을 짚었던 손이 잔을 들어 코앞까지 끌어왔다. 향 좋네. 케일은 만족스레 미소를 흘리며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제 앞에 앉은 남성의 질린 표정 따위는 보이지 않는 듯이. 남성 또한 익숙한 폼으로 식기를 손에 쥐었다. 더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알베르는 연하게 익은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곧 5년입니다. 이릅니까?”
“그럴 리가.”
“역시.”
말이 잘 통한다니까. 농익은 과실의 향은 부드럽고 풍성했다. 혀끝을 맴도는 쌉쌀한 맛을 음미하던 케일은 잘 익은 스테이크를 썰었다. 촉촉한 단면은 붉은 핏기가 배어 있었다. 입안에 걸리는 거 없이 부드럽게 씹혀 넘어가는 고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알베르는 식사에 집중하는 케일을 못 본 채 하며 와인 잔을 기우렸다.
영국 에스퍼 관리소의 대표인 알베르 크로스만과 미국 관리소의 실장인 케일 헤니투스. 두 사람은 사이좋게 저녁식사나 할 관계가 아니었다. 지난 5년간 미국과 영국 지부는 에스퍼의 관리 권한이나 요건을 놓고 줄곧 실랑이를 벌여왔으니까. 이제 곧 채임 1주년인 헤니투스 실장의 격려를 위한 대접이라는 대의적 명분을 세웠지만, 케일에게도 알베르에게도 엄연히 연장근무의 일환이었다. 영국 지부와 미국 지부가 이렇게 화목합니다, 같은 의미를 담은. 적당히 훈훈하고 격식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며 식사를 끝낸 테이블로 디저트가 서빙 되었다.
“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케이크 위 딸기를 집어먹던 케일은 알베르를 바라봤다.
“자네가 굳이 이 일에 나서는 이유가 뭔가?”
알베르에겐 확실한 이유와 명분이 있었다. 무시하고 덮어놓을 수 없는 이유가. 그렇지만 마주 앉은 이 녀석에겐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동류였다. 케일이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 두 사람은 서로를 명확하게 인지했다. 목적과 가진 수단과, 그를 이루기 위한 계획, 뜻하는 바가 같은 동류. 그러니 알베르는 더 의아했다. 이득 없는 고생을 사서 할 인물인가? 그가? 좋게 쳐도 손해 보지 않는 정도 아닌가? 케일 헤니투스는 겨우 그 정도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도 몇 년 씩이나.
“이유요.”
케일은 레스토랑을 환히 밝히는 조명과 식사를 즐기느라 시끌한 사람들을 무심한 눈으로 훑었다. 기회가 되서 묻긴 했지만, 제대로 된 답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알베르는 따뜻한 커피만 한 모금 마시고 있었다.
“대표님. 제가 좀 부자입니다. 돈이 많죠. 집안도 좋아서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허. 알베르는 대놓고 떫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겠다고 저렇게 운을 떼는 건지. 물론 케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저도 똑똑한 편이고.”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뭐 하나 모자랄 게 없다는 거죠.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별로 상관없지 않나요.”
“하….”
기가 찬다, 기가 차. 그는 진심이었다. 기가 차지만 틀린 말은 없다는 게 어이없었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한단다, 저 망나니가. 본인이 그렇다는 데 어쩌겠는가. 오히려 저런 녀석이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지도.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마신 알베르는 곧 말끔하고 상쾌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능력 있고 실력 좋은 케일 실장. 내가 자네 덕분에 늘 마음이 편안하지. 여태까지도 고생 많았지만 앞으로도 수고 좀 해주게.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요청하시고. 자네라면 선심 성의껏 도울 테니 말이야.”
이번엔 케일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리고 화사하게 웃었다.
“대표님께서 그렇게 신경을 써주시니 앞으로도 걱정할 게 없겠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잘 해온 것도 다 대표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기꺼이 도와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저는 아직도 배울 것이 많습니다.”
“자네는 참 겸손도 하지. 자네 같은 인사가 미국 지부에 있는 게 아쉬워. 언제 한 번 우리 지부도 구경 오게. 볼 건 없지만 심심한 견학은 아닐 테니까 말이야. 오늘 식사도 무척 즐거웠네.”
“저야말로 식사에 초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청만 해주시면 시간을 빼서라도 가겠습니다, 대표님.”
하하 호호, 인사치레를 주고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한 얼굴로 악수를 하는 두 사람이 곧 뉴스의 한 장면을 차지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최한도 같은 걸 물어봤었지.
말린 꽃잎을 띄운 욕조에선 진한 장미향이 맡아졌다. 따뜻한 온도에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풀어진다. 연분홍색으로 물든 몸을 내려 보던 케일은 천천히 제 심장 주위를 더듬었다. 희미하게 남았을 흔적이 붉은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젖혀 몸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헤니투스 일가는 그의 심장 위로 어떤 흉터도 남지 않길 바랬다. 귀하디귀한 아들의, 형의, 오빠의 죽음이 드리웠던 흔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쪽도 상관없어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그 뜻에 응했다. 그럼에도 치료를 받는 종종 아쉬운 기분이 들었던 건 왜였을까.
길고 지루한 재활 기간 동안 케일은 꿈을 꿨다. 거기서 그는 검은 머리에 키가 컸고, 좁은 집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낯선 언어를 쓰고 있어 말과 글자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꿈은 순서 없이 멋대로 튀었다. 어쩔 때는 어린애가 되어 더운 여름에 허덕였고 어쩔 때는 어른이 되어 낡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 처음엔 서로 다른 꿈인 줄 알았고, 세 번째가 되니 모두 이어진 이야기임을 알았다. 알싸한 통증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면 기억은 흐릿해졌다. 거기서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나'는 무엇을 했고 뭘 먹었으며 누구와 시간을 보냈는지. 뿌연 유리창 너머로 '나'를 보듯, 선명히 남는 게 무엇도 없었다. 한 줌도 안 될 잔상만 남았다. 어느 날 그는 '내'가 한 번도 거울을 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울을 봤다. 스물의 끝자락, 마지막 꿈속에서. 그리고 잠에서 깼다.
‘깜빡 졸았네.’
욕조 물은 이미 식어서 미지근했다. 케일은 세수를 한 번 하고, 샤워를 마저 끝내려 몸을 일으켰다.
“또 주무셨습니까.”
론이 따뜻한 머그컵을 건네며 인자하게 물었다. 젖은 머리칼을 대충 털어낸 케일은 그 잔을 받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기다리지 말라니까.”
투덜대는 대답에도 노인은 소리 없이 웃었다. 케일은 흰색 잔을 채운 레몬차에 다시 인상을 썼다. 불퉁한 얼굴로 말없이 차를 마셨다. 꿀이 들어가 시큼 달달했다. 케일의 건강이 안 좋아졌을 때부터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위해 사용인을 고용해 주었다. 론은 고용된 이후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유일한 사용인이었다. 11년 동안 그의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싫어하는 레몬차를 좀 줘도 이젠 받아 마실 만큼 케일은 나이를 먹었다. 철들었군. 노인은 내심 흐뭇한 감상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케일은 론에게 내일 일정 몇 가지를 확인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로잘린과 한스에게서 연락이 와있었다. 통화가 끝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그러니까, 최한도 자신에게 이유를 물었지. 폭신한 베개와 이불에 파묻혀 케일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에스퍼 연구 기관을 가장 먼저 창설한 곳은 미국이었다. 최초의 발현 이 후 지속적으로 발현자가 나타나자 기관은 보호와 연구를 목적으로 세계에 흩어져있는 발현자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슈를 불렀던 한국인 소년은 겨우 18살의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먼 이국으로 이송되었다. 세계 뉴스는 이 소년이 자신을 드러낸 아름다운 사유를 앞 다투어 보도했다.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 달리는 지하철을 멈출 만큼 강한 능력자, 최한이었다. 케일이 그의 존재를 처음 안 것도 그 때였다. 병실에서 종일 앉아 시간을 때웠던 때. 기관 대표는 선하고 어린 아시안 영웅을 위해 하루 빨리 그를 돕고 싶다며 입장을 밝혔다. 코웃음이 나왔다. 저 남자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 놈인지, 위쪽에선 이미 유명한 인사라는 걸 어린 케일도 알고 있던 탓이다. 돈도 욕심도 많은데 뒤까지 구린 놈이 겨우 선의를 위해? 가당치도 않았다. 케일은 검은 마스크를 쓴 채 사람들에게 인도 받는 까만 머리의 소년을 바라보다 채널을 돌렸다.
이후로 9년이다. 정확히는 8년 1개월이었다. 케일이 다시 최한을 보기까지의 기간과 최한이 기관에 발 묶였던 시간이. 그 사이 많은 일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에스퍼의 대우가 심각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저 아는 것과 직접 눈으로 마주치는 건 차이가 컸다. TV, 신문, 잡지 어떤 매체로도 느낄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 시선과 호흡과, 살아있는 생명체가 뿜어내는 날카로운 분노. 체념. 케일은 무덤덤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화가 났다.
최한이 처음으로 그에게 뭔가를 요구한 건 전담으로 3개월을 지낸 뒤였다. 케일은 그에게 협조의 대가로 원하는 걸 말해보라 했고, 그는 조용히 답했다. 가족을 만나고 싶어. …어쩌면 예상했던 대답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때 센터는 에스퍼를 가늠할 기준이 필요했고, 모든 기관을 통틀어 최한은 가장 우수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어지간히, 구슬려서라도 그를 써먹고 싶어 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이지. 좀 골치 아파도 할 만 했으니까. 케일은 오늘도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검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은 힘들어.
[그렇지만 약속하지.]
최한은 이 남자가, 내색하거나 드러내지 않지만 에스퍼에게 우호적이란 걸 알고 있었다. 덮어놓고 외면하고 오염물이나 괴물 취급을 하던, 그런 인간들과 달랐다. 믿을 수는 없어도 말해볼만 하지 않을까, 그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곳의 봄은 서울보다 따뜻한 편이었다. 아마도. 서울에선 한참 꽃이 필 때도 밤이면 패딩이나 코트를 입고 다녔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최한은 짙게 선팅한 차 안에서 만개한 꽃과 푸른 가로수를 하염없이 쳐다봤다. 해마다 열리는 벚꽃축제로 길거리는 인파가 북적했다. 화창하고 따뜻한 날씨에 사람들은 모두 편한 복장으로 즐기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걸친 옷이 불편해져, 최한은 괜히 재킷 소매만 매만졌다. 답답하면 좀 벗고 있던가. 그런 그를 보며 케일은 넌지시 말했다. 고개를 저으며 최한은 행선지를 물었다. 대사관에서 잡아준 레스토랑이 있거든. 약속한 날이 온 것이다.
8년 만에 만난 부모의 얼굴은 못 보던 주름들이 깊게 져 있었다. 8년 동안 자라지 못한 앳된 아들과 8년 간 삯아 늙어버린 어미와 아비는 서서 한참 동안,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들이 재회의 눈물을 흘렸던가, 아니었던가. 할 일이 많았다. 언제나처럼 미련 없이 그들을 남겨두고 돌아섰기에 케일은 그걸 영영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꿈이 아니었을까. 밀려드는 노을에 휩쓸려 물거품처럼 사라진 그런 꿈.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던 거 같은데, 할 수 있는 말이 없기도 했다. 세 사람의 식탁은 좀처럼 비지 않고 고요하게 식어갔다. 서로가 다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자리를 하염없이 봤던 것도 같다. 저를 간절히 잡았던 두 분의 거친 손이, 손마디 사이사이에 까끌하게 남아, 소년도 함께 간절해졌다.
[생일선물이라 하기로 했어.]
[… ….]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만날 수 있으니까.]
너는 한 달 빨랐지만. 케일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렇게 설명했다. 최한을 시작으로 센터에 있는 에스퍼들의 '생일선물'을 진행할 거라고. 아직 스무 명 정도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이후부터는 관행으로 만들 예정이라고. 그래서 굳이 대사관을 거쳤다고 말했다. 단순히 실장 개인의 아량이 아니라, 지부와 정부의 뜻으로 못 박기 위해. 최한은 내내 창밖을 보던 시선을 옮겼다. 케일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자신에게 향하는 말이 이제 퍽 정중하다. 그 차분한 목소리 때문인지 케일은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스스로 한 번 쯤 물었던 질문을 곱씹어봤다. 이유를 물으면 내세울 게 없진 않았다.
일단 비크로스, 론의 친아들이자 우수한 요리사인 그가 몇 년 전 에스퍼로 발현했다. 발현자인 게 발각되면 예외 없이 연구 기관으로 가야 했다. 폭동과 탄압을 겪은 후, 사회는 더 민감하게 그들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케일은 론이 제게 드물게 부탁하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이미 탄압에 휩쓸려 아내를 잃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들까지 뺏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케일은 그의 요리를 꽤 좋아했기에 순순히 함구에 협조해주었다. 그리고, 집안 사업과 가장 긴밀하게 얽혀있는 크로스만의 장남, 알베르 또한 에스퍼였다. (이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 데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거다.) 어차피 가업이니 뭐니 다 차남인 동생에게 떠넘길 생각이었지만, 알베르는 비즈니스 파트너로 훌륭한 상대였기에 좀 아까웠다. 둘 다 여태까지 비밀을 잘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겠는가. 세상엔 영원한 비밀이 없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러니 그들이 무사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주변이 편안하려면 지금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괜찮은 방법도 있고, 할 만한 능력도 있었다. 구구절절 긴 사유를 요약하자면 케일 자신의 평온을 위한 일이었다. 아마 이 정도만 말해도 이 녀석은 납득하겠지. 그런데 어쩐지.
까만 유리창으로 저를 보고 있는 그의 그림자가 비친다. 흐릿한 형태는 언제라도 사라질 것처럼 불안해보였다. 그걸 보니 어쩐지, 케일은 충동적으로 입을 달싹였다.
[최한, 너도 있었지. 죽을 뻔 했던 적이.]
그렇지만 그도,
[나도 있었거든. 하지만 난 살아남았지. 너도 살아남았고.]
자신도, 여기 있었다.
케일은 최한을 볼 때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서늘한 얼굴은 그처럼 까만 머리카락에 까만 눈을 하고 저렇게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생소하고 낯선 사람인 동시에 ‘나’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천애고아가 된 ‘나’, 폭력과 방치에 굴복한 채로 삶을 버텨낸 ‘나’, 은사를 만나 처음으로 존재의 인정을 받았던 ‘나’. 그리고 ‘그’의 마지막…….
[기왕 살아남은 거, 좀 마음대로 해보는 거뿐이야. 마음이 가는 일에 이유가 필요한가?]
[… ….]
[난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든.]
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실장님. 힐스만은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어느 새 밤이 되어 환한 실내 주차장에도 적막함이 흘렀다.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마중 나온 로잘린이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유능한 사람이라서. 케일은 최한과 함께 차에서 내리며 말을 덧붙였다.
[너 하나쯤은 도와줘도 크게 지장이 없어.]
최한은 그 날 하루,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3.
회식이라기엔 과하게 호화스런 풍경이다. 하얀 식탁보를 씌운 식탁 위는 여러 음식들과 꽃과 장식이 화려하게 놓여있었고, 천장에는 눈부신 샹들리에가 반짝이며 늘어져있었다. 넓은 식당 한 가운데를 상아색 테이블과 연한 라벤더 색의 의자가 가지런히 채웠다. 칙칙한 회백색 바닥도 어떻게 광을 낸 건지 번들거린다. 하루아침에 공용식당이 연회장처럼 변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진한 재력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최한은 타일 위로 비치는 제 까만 그림자를 내려 보다 고개를 들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눈에 확 띄는 붉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케일이었다. 그의 손에는 늘 보던 서류철 대신 주스 잔이 들려있었다.
“여러분의 노고에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모두가 주인공이란 마음으로 즐기셨으면 좋겠군요. 음식은 넉넉히 준비해 두었으니 사양 말고 실컷 드십시오.”
진작부터 음료를 들고 있던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왠지 신나 보이시네. 멀뚱히 서있던 그에게 라크가 다가와 접시를 쥐어주었다. 형, 어서 가자. 온과 홍은 이미 그릇에 음식을 쌓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이 아이들의 흥을 돋웠다. 뷔페로 다가간 최한은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가지런히 담긴 수육과 갖가지 채소, 빨갛게 무친 무말랭이가 눈에 띄었던 탓이었다. ‘보쌈?’ 어눌한 발음으로 되묻는 그에게 얼마나 열심히 설명했던가. ‘대충 알 것도 같다. 한국에 그런 요리가 있었지.’ 그 때 케일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그가 찾고자 한다면 굳이 자신이 공들여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에도 케일은 최한의 설명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새삼 둘러보니, 애도 어른도 접시에 담은 음식이 다 달랐다. 온과 홍은 찐빵 같은 만두를 한껏 담아 먹고 있었다.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서서 뭐 해.”
케일이 그에게 다가왔다. 케일은 최한이 보고 있던 음식을 한 번,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저게 그렇게 맛있냐?”
“드시는 법 알려드릴까요?”
“뭘 그렇게 까지….”
사르말레랑 비슷한 거 아닌가. 내용물을 이미 싸놓은 거랑 아직 안 싸둔 것 차이로 보이는데. 떨떠름해하는 그를 뒤로한 채 최한은 집게를 들었다. 연회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초반에 어색해했던 사람들도 지금은 꽤 풀어져있었다. 특히 연구원들과 에스퍼들이 뒤섞여 함께 대화를 하거나 테이블에 앉아있는 모습은 신선하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한쪽만 모여 있는 무리도 있었고 마냥 화기애애하진 않았지만, 그 정도야. 그가 한스와 사람들이 내미는 음식이 가득 찬 접시를 보며 얼굴을 찌푸린다. 나 말고 너네 먹으라니까, 라고 투덜거렸다.
“최한.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연회장에 들어오기 전, 평소보다 짧았던 면담에서 그가 전달한 말이 있었다. 될 수 있으면 라크나 온, 홍 같은 아이들과 함께 있어달라고. 그리고 꼭 자신이 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라고. 갑작스런 말이었지만 그를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는 케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퍼들과 연구원들을 제제 없는 상황에 함께 풀어놓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최한은 이곳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실장 대리직을 맡고 있는 책임자라 해도 마찰 없이 평화롭게 연회를 주최한 건 아닐 것이다.
최한은 몇 년 전, 센터의 심한 압박을 보다 못해 크게 반발한 적이 있었다. 그 계기로 기관은 아직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케일이니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나아가 그가 얘기한, 이유 없이 하는 일을 완성하기 위한 스케치가 아닐까. 최한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이 낯선 밑그림도 당신의 마음에 포함되어 있는 거겠지. 그러면 당신이 바라는 완성된 풍경은 어떤 모습이냐고. 당신이 바라는 그 미래에, 나 또한 포함 되어 있다면 좀 더.
최한이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을 때, 케일은 한산한 자리에 앉아 연회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의 표정은 드물게 밝아, 누가 보아도 이 전경에 흡족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담은 쿠키를 하나 집어 먹으며 생각에 빠졌다. 슬슬 때가 됐을 텐데. 오늘을 위해 꾸준히 떡밥을 던져 온 그였다. 숨어버린 쥐새끼를 찾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겠는가. 스스로 기어 나오도록 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되 틈새를 만들어, 상대로 하여금 기회를 노렸다고 착각하게끔 유도하는 미끼. 그리고 상대가 미끼를 물었을 때, 드디어 이 프로젝트의 결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연구 기관이 발현자에게 행한 부당한 처사와 대우를 고발하고, 그들의 권리신장을 위한 울타리를 만들 결말. 그 초석을 닦기 위한 결말이었다. 케일이 찾고 있는 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표의 끄나풀이었다. 지난 일 년 간 눈에 띄는 세력을 바쁘게 치워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자신의 뒤를 누군가 캐내고 있음을 눈치 못 챌 정도로 빠르게, 위기감에 숨이 막혀 놈의 마음이 급해지도록. 그래서,
“음식이 굉장히 맛있어요. 실장님 덕분에 호강하는 군요.”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도록.
새하얀 머리를 올려 묶은 여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와 대비되는 짙은 피부 사이로 진한 녹색 눈동자가 사근이 웃고 있었다. 케일은 나오는 감탄을 삼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여자라니, 그 새끼 생각보다 능력이 좋았네. 그는 최초의 에스퍼‘이었던’ 사람이자, 미국지부에서 두 번째로 강한 힘을 가진 발현자였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헤니투스가 굉장히 부유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늘 놀라게 하는 재력이네요. 또 이벤트를 기대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셀레나. 다음 것도 분명 마음에 들 겁니다.”
“그래요? 다음이 있다니 그거 참…, 설레네요. 어떤 이벤트인지 살짝 물어봐도 되나요?”
그가 테이블 끝에 살짝 걸터앉았다. 케일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셀레나는 최한과 더불어 제일 유명한 에스퍼였다. 언론이 가장 먼저 발견한 발현자였으며, 과거 탄압에 저항했던 동맹 중 살아남은 에스퍼였다. 말하자면 꽤 거물이란 얘기다. 인지도가 높으니 조금만 움직여도 큰 파란을 불러오는 인물.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런 거물을 꼬드긴 ‘진짜’는 누구냐가 더 중요했다. 케일은 조용히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그를 당길 낚싯줄을 던지고 있었다.
“이벤트는 비밀스러워야 즐겁지 않습니까. 미리 알면 재미없을 겁니다, 셀레나.”
“능청스러우시긴.”
셀레나는 마치 재밌는 장난을 치는 듯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멀리서 이쪽을 보고 있는 까만 눈과 눈을 마주했다. 탄압 이후로 8년을 보고 산 낯익은 얼굴이다. 살갑게 지낸 적 없더라도, 서로를 탐색하기 충분한 세월이었다. 안녕, 소년. 굳어지는 최한의 표정을 감상하며 그는 즐겁게 입을 열었다.
“그게 어떤 비밀이든 또 우릴 충분히 놀라게 하겠죠. …예측하기 힘든 망나니 실장님.”
케일은 오랜만에 뒤통수가 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설마.
“…빌어먹을. 생각보다 담이 크시군요.”
“난장은 제 소소한 취미라.”
이 여자는 꿰인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한 패였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샹들리에가 끊어졌다.
테이블이고 뭐고 모두 엉망진창 뒤집혔다. 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케일은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빗겨간 샹들리에를 보고 심장을 쓸었다. 망할 뻔 했다, 정말로. 간발의 차이로 자신을 빼돌린 최한이 흉흉한 기세로 여자에게 맞섰다. 대피로 혼란스런 와중에 한스와 힐스만이 사람들을 챙기고 있었다. 힘은 당연히 최한이 우세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 녀석이 나서면 더 곤란해지는 건 케일이었다. 그걸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푸핫, 여자가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독기 좀 빠진 것 같더니 정말이었네. 그는 진심으로 저 모습이 흥미로웠다. 이어 천장의 조명이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소란이 가중되자 욕지거리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분명 이럴 줄 알았다고! 저 괴물 같은 것들을 뭘 믿고 풀어준 거야? 그 목소린 곧 화병 깨지는 소리에 묻혔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실장님? 어차피 이 판은 망했어요.”
“케일님, 제가 막고 있을 테니 일단 피하세요!”
쿵! 식탁 반쪽이 이쪽으로 날아오다 패대기쳐졌다. 이야, 직접 보니까 장난 아니네. 케일은 최한을 더 세게 붙들었다. 예상보다 저쪽이 과격하게 나왔다. 이대로 저 여자를 최한이 제압해도 에스퍼의 폭주니, 그들의 위험한 실태니 하며 여론을 몰아갈 테고, 그렇다고 일단 피하자니….
‘그럼 분명 죽겠지.’
목숨까지 걸 생각은 아니었는데 상황이 골치 아팠다. 아직 찾지 못한 그 놈, 또 다른 협력자를 찾아야했다. 셀레나는 목적을 달성하거나 도망칠 시간을 끌 역할이겠지. 케일님, 어서요. 케일은 저를 재촉하는 최한에게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없었는 데 당장이 급했다.
“최한, 저 쪽은 한 명이 아니야. 적어도 둘, 많으면 세 명은 될 거다. 그리고 밖에는 로잘린과 다른 사람들이 있어.”
“네? 무슨….”
아. 최한은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니 그쪽을 찾아서 먼저 잡아야 했다. 이미 도망쳤다면 차라리 다행이지. 도망가는 놈들을 로잘린과 케이지 일행이 잡아낼 테니까. 하지만 만약, 아직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최한이 밀릴 일은 없겠지. 최한도 케일도, 가진 힘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판단을 내린 케일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혼잡한 바깥에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렸고
“들어가면 안 돼!”
“케일님!”
시발 이것들이 진짜─
그는 뛰었다.
4.
주사위가 굴러간다. 12면의 눈금이 두 숫자를 가리키면 말은 자리를 옮긴다. 당신이 온 세계를 세 바퀴 쯤 돌았을까, 당신은 내게 말했다. 너 진짜 운이 없구나. 나의 말은 섬 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웃었다. 그러게요, 케일님.
[이런 걸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친구들이랑 자주 이렇게 놀았거든요.]
당신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답하지 않을 당신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다정함에 치사량이 있을까. 이렇게 숨 막히는 것에 차라리 빠져 잠길 수 있다면. 주사위가 또 한 번 굴러간다. 나의 말은 섬 밖으로 나가 당신의 옆에 섰다.
[음, 내 땅이네. 돈 줘.]
자꾸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물었다. 그냥 장난감 놀이인데 드물게 진지한 모습이다. 그게 또 당신 같아서 나는 기꺼웠다. 이까짓 걸 안겨주고 당신 옆에 갈 수 있다면 전부 드려도 좋아요. 잠길 수 있다면 온 몸을 던져서라도, 잠기고 싶다고. 당신과 나의 거리는 늘 한 뼘. 고작 한 뼘이다. 그러나 내내 닿지 못할 한 뼘이었다.
5.
“…론?”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
“…내가 얼마나 잔거지.”
삼 일을 푹 주무셨지요. 론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셔 케일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픈 건 싫은데. 수액을 따라 진통제가 들어오고 있음에도 뱃가죽이 아릿했다. 방심한 것도 아니었는데 뼈아픈 실책이 돼버렸다. 전부 나 편하려 벌인 일인데, 정작 내가 드러누워 버리다니.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지. 케일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론이 물병에 빨대를 꽂아 그의 입가에 대어주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 케일은 적당히 목만 축인 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끔벅, 눈을 끔벅였다. 그렇게 잤는데 또 졸리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더 주무십시오. 노인이 부드러운 손길로 이불을 정리해주었다.
“최한은.”
감기는 눈을 힘겹게 뜨고 있느라, 케일은 론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곧 답을 종용하는 도련님의 눈빛에 다시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론은 최대한 짧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해 말해주었다. 케일이 쓰러진 후 들이닥친 경찰들이 입구에서 총을 쏜 남자를 구속했고, 뒤이어 구급대가 다친 사람들을 실어 병원으로 이송시켰다. 총상을 입은 케일을 비롯해 중상자는 세 명. 셀레나도 그 중 한 명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상태라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크고 작은 찰과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이 사태의 뒷배로 드러난 대표가 제일 먼저 체포 되고 차례로 그와 단합한 인간들이 잡혀 들어갔다. 그동안 선행을 방자해 사람의 인권을 유린한 죄와 탈세, 뇌물 혐의까지 밝혀져 선고를 피하긴 힘들 거라고 론은 말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히 털렸다. 미리 짜 맞춘 대로 알베르가 손을 쓴 것이리라.
최한은 쓰러진 케일을 붙들고 놓질 않아 응급대원을 난처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병원까지 따라 가려던 걸 한스와 로잘린이 겨우 저지 시켰고, 수술이 끝난 다음 날 아이들과 함께 제일 먼저 병원을 찾아왔다고 했다. 용케 병문을 허락했다고 생각했더니 임시로 대표 권한을 넘겨받은 테일러가 승낙했다고 론이 덧붙였다. 기껏 찾아왔어도 케일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상태였고, 병원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센터로 돌아갔다고 한다. 론은 안절부절 못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난히 얌전히 서있던 최한을 떠올렸다. 기세가 보통 흉흉한 게 아니면서 겉보기는 침착해 보여,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조사도 거의 끝나가니 정부에선 일단 에스퍼들을 귀국, 귀가 조치 취하기로 했습니다. 한 번에 내보내면 혼란스러울 테니 오래 있었던 사람부터 천천히 보낸다고 하더군요. 연구원들은 추가 조사를 진행할 모양이지만 곧 끝날 겁니다.”
“웬일로 빠르네.”
“사안이 크니 급하겠죠.”
그래. 뭐든 큰 일이 터졌을 땐 신속하고 침착하게 처리하는 게 제일 좋지. 아무튼 별 탈 없이 마무리 되고 있는 듯 했다. 케일은 다시 늘어졌다. 이제 진짜 졸려. 아,
“…그 녀석 언제 나가는 데.”
“내일 정오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그 때 나 좀 깨워줘. 중얼거리던 케일은 다시 잠이 들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던 론은 혀를 찼다. 일 년을 싸매고 다닌 탓인가. 그새 웬 놈한테 정이 든 모양이다. 최한의 품에서 벗어난 케일은 이미 피가 멎어있었다고 했다. 복부를 관통한 것도 아닌데, 현장 바닥에서 탄환이 발견되었다. 상처를 틀어막은 것처럼, 수축된 근육과 찢어진 장기를 돕고 있는 것처럼, 응급처치를 하고 수술에 들어가기까지 무언가가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으로 부터. 의료진에게 상황을 전해 들으며, 자신은 왜 자꾸 그 새까만 놈이 떠올랐는지. 설마…. 과한 기우겠지. 노인은 잠든 강아지 도련님의 머리카락을 잘 정리한 후 걷었던 커튼을 내렸다.
─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나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가 있다.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양심을 지니고 있으며, 형제애의 정신에 입각해서 서로 간에 행동해야 한다.」 …1948년 인권 위원회에 의해 완성된 인권 선언문의 제 1조항입니다… ….
연설을 하는 알베르의 모습이 TV를 가득 채웠다. 덤덤하고 진중하게 국제 에스퍼 연합의 설립을 선언하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케일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지겹도록 논의한 내용이다. 굳이 듣지 않아도 다음 문장의 철자 하나까지 다 떠오를 지경이었다. 다만 선선한 감상이 들긴 했다. 드디어 이 짓도 끝이구나, 같은 거. 케일은 심심한 입을 다셨다. 포도가 먹고 싶은데 아직 묽고 부드러운 음식만 먹어야 했다. 이게 무슨 고생이야. 억울해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9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가는 소년.]
휴대폰 액정에는 헤드라인과 함께 한 장의 사진이 크게 걸려있었다. 많은 인파가 몰린 덜레스 공항 가운데서, 한 가족이 부둥켜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마중 나온 부모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를 보며, 케일은 흡족함과 아쉬움을 느꼈다. 이 녀석 우는 건가? 하긴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연설의 마지막 문단을 읽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우리는 다시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했던 대헌장의 뜻을 이어, 스스로를 지키고 세우는 것을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6.
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침묵처럼 가라앉은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x월 xx일, 오후 4시 성과보고. 건강 상태는 좋지만 심신불안의 해소를 위해 지속적인 케어를 요한다. 1차 안정화 결과 D, 2차 안정화 결과 B. 3차 안정화 결과 C. 아직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함. 손동작이 많은 수작업 공예가 효과적임. 몇 마디가 더 지나간 후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럭저럭 괜찮네.
국제 에스퍼 연합회가 설립 1주년을 맞았다. 케일은 성대한 축하식에 끊임없이 초청 받았지만 모두 무시로 일괄하고 있었다. 그런 피곤한 자리에 왜 나가, 귀찮게. 덕분에 한산해진 협회에서 그는 천천히 라온의 검사 결과를 살피고 있었다. 최근에는 힘과 심리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가 한참이었다. 그리고 꽤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었다. 케일은 부상을 회복한 후 센터에 복귀하지 않고 협회의 고문 비슷한 자리를 꿰어 찼다. 이유? 단순했다.
‘진짜 꿀 빨기 좋다니까.’
소소한 취미도 생겼다. 한국 소설 읽기였다. 꿈속의 남자가 지겹도록 붙들고 살던 바로 그 소설들이다. 처음에는 이해도 안 되고, 이걸 무슨 재미로 읽는 건지 몰랐으나 적응하니 읽을 만 했다. 요즘 보고 있는 소설은 주인공이 책 속의 세계로 들어가 망나니짓을 하며 백수를 꿈꾼다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그런 주제에 스케일 큰 일만 치고 다니는 주인공이 기가 차고 웃겼다.
“선생님, 로비에 선생님을 찾아온 손님이 있어요.”
“찾아올 손님 없을 텐데. 누구입니까?”
“글쎄요. 내려가 보세요.”
로잘린이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보니 좀 불안해져 케일은 떫은 얼굴로 가운을 걸쳤다. 짐작 가는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 자신을 대타로 축하식에 보내버린 한스가 벌써 돌아온 건가. 아니면 애들이 로잘린씨와 또 장난을 치는 건가. 호되게 당했던 예전 기억에 진절머리를 치며, 로비로 나가는 계단을 내려갔다. 협회 건물은 전(前)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이 시간의 로비는 오후의 햇살로 환하게 밝았다. 그 눈부신 조명을 등지고,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러는 케일님도 여기 계시잖아요.”
…최한이었다. 무슨 대답이 저래. 엉뚱한 답을 듣고 황당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케일에게, 그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케일이 늘 봐왔던, 순하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허 참, 그렇게 힘들게 돌아갔으면서 여기는 뭐 하러 온 거야. 그런데 웃고 있는 녀석을 보니 그만 할 말이 없어져 케일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나 아무래도…, 저 얼굴에 약한 거 같지. 케일은 문뜩 떠오른 생각을 막지 못했다. 저 놈 혹시 알고 이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최한은 그에게 마저 인사를 건넸다.
“제가 오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요, 케일님. 마음이 가는 일을 하는 데엔 이유가 필요 없잖아요. 내 발자욱에 흔적이 남는다면 그건 당신의 흔적이면 했어요. 당신이 했던 것처럼, 누군가를 돕고 또 당신을 돕고, 내 가족과 나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당신의, 최한은 뒤따르는 모든 말을 삼켰다. 그냥 언제나처럼 그를 지긋이 보고 있었다.
“그래. 뭐….”
케일은 어쩐지 눈 밑이 간지러웠다. 최한의 등 뒤에서, 반짝이며 쏟아지는 저놈의 햇살 때문일 거라고,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생각 했다.
“니 마음대로 해라.”
평범하고 평화로운 오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