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잔재
‘케일 헤니투스’ 라는 사람은 지치고 말았다. 사실 털어놓고 본다면 그가 지친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았으나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내뱉기에는 케일은 너무나도 귀찮았고 설상 내뱉었다 해도 그 후에 주변에 있는 애들의 행동들에 반응하자니 오히려 그게 더 성가실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런 생각으로 자기합리화를 하기로 했다.
‘이때까지 내뱉지 못한 고단함은 심장의 활력을 통해 사그라질 것이다.’
그 누가 들어도 황당무계한 생각이라고 할 것이다. 케일답지 않으면서도 케일다운 발상이었다. 딱히 무언가 건들기 귀찮고 움직이기 귀찮고 그리 대처하기에 어려운 상황이지 않기에 귀찮았다. 그렇기에 그러려니 넘긴 이 생각은 지독한 자기합리화란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암의 처단 이후 행복한 백수라이프를 고대하고 있었으나 우리 로운 왕국 민들의 마음속의 별이신 알베르 저하께서 로운 땅의 태양이신 국왕 전하가 되시면서 한여름의 밤처럼 없어졌다.
“그냥 인사치레 없이 떠났어야 했는데.”
“하하, 케일 공자 혹시 속마음과 말이 바뀌지 않은가 싶은데.”
“전 겉과 속이 올곧은 사람이기에 로운의 태양이신 국왕 전하께 숨김없이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돌겠네.”
국왕 곁에는 재상이 따라다니고 직책 있는 귀족 곁에는 보좌관이 따라다닌다. 그리고 알베르 국왕 전하 곁에는 케일 공자가 따라다닌다. 로운 왕국민이라면 한 번쯤은 내뱉은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도 했다.
역시 로운 왕국을 위해 나선 영웅 케일 헤니투스는 로운을 위해서 전하 곁을 지키는 구나!
라고. 이 사실의 주인공이신 알베르와 케일만이 그것이 허구적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케일이 알려진 것처럼 자진해서 보필하겠다고 의지를 표현을 한 것이 아닌 알베르가 유능한 케일을 놓치기 싫어 노력 끝에 자신의 곁에 일시적으로 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동족. 그런 이는 쉰다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먼저 앞장서 일을 해왔으며 생각보다 서류처리도 능숙하여 제 곁에 두고 싶은 이상적인 재상이었다. 그렇게 탐낼 만한 인재이면서도 국왕이 직접 제안을 해도 거부할 위인이기에 제 곁에 서류작업만 도와주는 것으로 감지덕지 해야 했다. 애매하게도. 말은 투덜투덜 불평을 내뱉으면서도 서류처리는 확실하게 하니 무엇이 상관있으리라. 알베르는 그렇게 자기 생각을 결론지었다.
“그보다 아까부터 뭐 하는 거지?”
“뭘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아까보다 한결 편해진 말투에 알베르는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말투가 아니라 태연하게 받아치는 케일의 행동에 언짢아진 것이지만 둘 다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짜 모르고 저런 말을 하는건가?
귀찮다는 식의 나른한 짜증을 표현하기보다는 일그러지는 두통에 고통을 참는 듯한 표정. 무엇이 안달 난 것인지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손가락. 하얗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창백한 인상.
누가 보면 아픈 사람 혹사시키는 줄 알겠네. 젠장.
“이틀.”
“네?”
“이틀 정도 유급휴가 줄 테니 쉬다오라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무슨 수작인 거지. 케일은 이야기를 나눌 때마저도 계속 서류에 떼지 않았던 시선이 알베르로 향했다.
“...드디어 머리를 다치셨습니까?”
“이제 막 나간다?”
“아니. 뭐, 사람이 놀라면 그럴 수도 있죠.”
케일은 당황해서 말이 헛나올 만했다. 휴가 없이 어떻게든 일을 시키려던 알베르 전하는 어디 가고 하루도 아니라 이틀-게다가 유급이다-휴가를 주는 사람이 눈앞에 생겨버렸다.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는 거지?
케일은 제 손에 들린 서류와 책상에 쌓인 서류. 그리고 알베르 곁에 겹겹이 쌓여있는 서류들의 탑을 보면서 당연하게도 의심이라는 감정부터 들었다. 이 숨을 쉬기도 시간이 아까울 정도의 일이 있으면서 자신에게 난데없이 휴가를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여기가 꿈이었던가?
하지만 자신의 품에 얌전히 있는 황금패의 존재에 혼란을 가라앉혔다. 그런 행동을 하는 케일을 본 알베르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휴가가 필요 없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로운의 태양께 은혜를 받아 기쁨에 겨워 그런 겁니다. 그럼 이틀 뒤에 뵙도록 하죠.”
좋아. 빨리 안가면 말을 무를지도 모른다. 케일은 가볍고 의연하게 생각하자는 결심과 동시에 서류들 사이에서 벗어났다. 그런 케일의 뒷모습이 사라지니깐 알베르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넘겼다. 아까는 아파 보이는 케일의 모습만 보여 충동적으로 한 결정이 주변의 서류들이 이틀간 모두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몇 분전으로 시간을 돌린다고 한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거지만.
알베르는 자연스럽게 찌푸려진 미간을 검지로 꾹 눌렀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아 최한님. 케일님께선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헤니투스.
현재 데르트 헤니투스 전 가주의 차남인 바센 헤니투스가 백작위를 계승 받고 난 후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왕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올라선 케일 헤니투스. 백작가의 장남이자 로운 왕국을 위해 희생한 케일 헤니투스가 백작위를 계승 받는 것을 당연시 여겼기에 여론이 잠시 혼란스러워졌던 것도 이젠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비난과 반박이 한번 휘몰아치기는 했으나 굳세고 영지민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바센 헤니투스와 황궁에 들어가 재상- 그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으로 일하는 케일 헤니투스의 모습에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차분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 후에 바센은 헤니투스 백작가의 저택에, 케일은 황궁에 지낸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케일의 거처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이 짱돌 저택에.
황궁에 지내기 불편하다는 케일의 말과 추진력에 의해 이 저택 내에 텔레포트 진을 설치하여 출퇴근 식으로 다니게 되었다. 그로 인해 좋아했던 건 케일도 아닌 알베르도 아닌 이 저택에 지내는 이들이었다.
이틀간의 휴가로 인해 좀 더 자주 케일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저택 사람들은 평소보다도 들뜬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들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어색할 만도 하나 서로가 그 이유를 알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해냈다.
그들은 케일을 많이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깐.
휴가를 얻으면 조금 더 색다른 일을 할 법한데 20대의 케일처럼 침대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케일다워서 너스레 넘어가지만.
최한도 그런 모습이 케일님답다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한스의 언질을 듣고서 실수로 내뱉은 한글에 얼굴은 삽시간 내로 붉어졌다. 그게 최한 자신도 적나라하게 느껴지는지라 문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자 저택 내에서만 알려진 그들의 열애 소식을 아는 한스는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행동으로 알려주는 최한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면서 지나칠 뿐이었다. 그걸 눈치채기에는 최한은 자기가 내뱉은 말에 부끄러워하기 바빴다.
“[그래도 매일 두 번씩은 만났는데.]”
황궁으로 가는 아침에 잠시. 그리고 돌아온 밤의 시간은 길게. 케일은 자주 보지 못해서 서운해하는 최한의 모습을 보고서 스스로 정해준 규칙이었다.
최한은 그런 배려심에 늘 감사하고 있었으나 오늘만큼은 보기 어렵다는 생각에 아쉽기는 매한가지였다. 침대에 작정하고 잠을 잔다면 12시간은 거뜬히 넘는 건 케일에게 흔한 일이었기에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가시지 않는 아쉬움을 억지로 삼켜냈다. 최한에게 휴가는 좀 더 서로를 만나고 즐길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기에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케일님을 이해해야 했다. 여유롭게 지내는 자신과는 달리 바삐 일하는 케일님이시니깐. 온종일 일해온 케일님은 지쳤을테니깐.
어리광을 부려서는 안됐다.
“..케일님?”
“응?”
“벌써 일어나시는 겁니까?”
“아까 안에 있는 애들도 그러더니 그래도 황제 무시하고 땡땡이치는 인간은 아니거든?”
아마 안에 있는 애들은 온, 홍 그리고 라온을 지칭하는 것일 거다. 땡땡이라는 단어를 여기서도 사용하나?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다. 분명 케일님은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휴가라고 모두에게 말했을 텐데 지금 황궁으로 일하러 간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거지?
자신이 케일님의 휴가를 너무나도 소망하기에 생긴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스는 아직 주무시는 케일님께 유한 태도를 보였고 다들 쉬는 케일님께 무엇을 할지 농담스레 모의를 하기도 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케일의 의견에 반박이라는 것은 최한에게는 꽤 어려운 주제였기에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케일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신경 쓰이는 건 신경 쓰이는 거다.
“하지만 케일님께선 이틀간 휴가를 받으시지 않습니까?”
“응? 그건 무슨 소리야?”
“분명 그러셨습니다. 알베르 전하께서 케일님께 이틀간 휴가를 주셨다고요. 모두가 그 사실을 들었습니다.”
“음. 영상구로 그렇게 전했나? 그러면 한스한테 조금 더 쉴테니 천천히 오라고 전해.”
영상구? 알베르 전하가 아니라 케일님 본인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라고 최한이 말하기에는 이미 케일의 방문은 닫히고 말았다. 최한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인가? 굳게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최한은 잠시 의아함과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시 문을 열고 의문을 표현하기까지 행동하는 것은 필요 없다는 판단이 들어 끝내 발걸음을 돌렸다. 진심을 조금 말해보자면 케일님의 얼굴을 봐서 무엇이든 좋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것이 첫 전조인 줄도 모르고서.
*
“전쟁터에 있어야 할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거의 꼬박 하루를 침대에서 보낸 케일이 깨자마자 내뱉은 말이 저택에서는 큰 파동을 일으켰다. 시간이 계속 흘러도 케일의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아이들은 케일에게 놀자며 깨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성향을 봐서는 하루 정도 케일이 뒹굴거리도록 참은 것이 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케일이 어쩔 수 없다면서 몸을 일으키려는 모습을 예상하며 최한은 미소를 지었으나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굳은 최한과 놀라서는 온 저택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에 모두는 혼란에 빠졌다.
*
“케일님. 대체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오히려 내가 물을 말인 것 같은데.”
케일님께서 기억을 잃으셨다.
이 한마디의 파급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저택 내의 사람들이 모두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고서 방으로 몰려 들어왔다. 다른 귀족들의 저택에 비해 턱도 없이 적은 수의 사람이지만 한 방에 모여드니 비좁은 느낌은 확연히 들었다.
그걸 케일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반신반의하면서 물은 질문은 다른 생각도 하기 힘들게 혼란만을 주었다. 장난인가. 아니면 여기 만우절이라는 날이 있던가. 가볍게 생각해보려 했으나 진중하면서도 심각한 표정은 진실임을 알려줬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케일도 케일 나름대로 정리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분명 자신은 지휘하고 있었는데 인식할 수 없는 암전 후에 보이는 것은 자신이 짱돌 저택에 깨어난 사실이었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하지 않은가
“케일님. 그.. 제 소견으로는 기억을 일시적으로 잃으신 것 같습니다..”
“나랑 저번 겨울에 눈싸움한 것도 기억 못 하는데!”
“나랑 오늘 놀자고 한 것도 기억 못 하던데!”
“내가 성장한 것도 기억 못하는 걸!”
1명과 3마리의 말들이 케일을 몰아붙여 왔다. 진짜 장난치는 거 아냐? 한스와 3마리의 말이라면 그런 쪽이 신빙성이 있을법했으나 점점 심각해지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과 묘하게 연륜이 느껴지는 외모들에 열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연기의 소질이 전혀 없는 최한이 저렇게나 심각해지니 무서워서라도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거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기억을 잃었다면 기억을 찾으면 되는 것이고 찾지 못하면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나가면 된다. 기억 일부가 없어졌다고 해도 관계가 쉽게 깨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건만 오히려 더 압박되는 기분에 형용할 수 없는 기분마저 들었다. 기억을 잃은 건 나인데 왜 얘들을 위로해야 하는 거지. 울며 겨자 먹기로 설득하려고 했는데 최한은 조용하고 진득한 어둠을 비추며 자신을 바라봤다. 왜 저렇게 무섭게 봐. 진짜로 기억으로 관계 형성하는 거야? 아니지. 최한. 우리 지금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인연을 이어갈 수 있어. 침착하게 생각해봐.
케일은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으나 점점 심각해지는 표정에 우리를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의도란 것을 깨닫고 최한은 자신의 입안 여린 살을 세게 깨물었다.
“신관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무래도 교단의 신관은 케일님께서 꺼려하시니 파문된 신관 쪽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아니죠. 최한님. 신관은 외상을 치유하는 쪽이니 치료사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케일님 휴가를 연장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요. 외부로 알리지 않도록 하겠지만 국왕 전하께는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한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 사태에 슬퍼하기보다는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케일님은 그만큼 굳건하고 위험한 상황에도 그 끝에 미소를 지은 분이시기에 이런 상황에 각자가 무엇을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도 무리가 아니였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야 했다. 그 사실을 최한의 의도가 아니었어도 일깨워주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케일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 장본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까.
모두가 흩어져서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기억을 잃은 케일의 상황을 고려해 모두가 나가 해결책을 찾으러 바삐 뛰어나갔다. 아니 정정하겠다. 최한을 제외한 나머지가 다급하게 나갔다. 최한은 빠져나가는 그들의 등을 바라봤다. 특정하게 제 할 일을 정하지 못한 최한은 뜻 모를 답답함에 그만 케일의 문 앞에 주저 앉아서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넘겼다.
자신의 실책이다.
기억을 잃었다는 판단이 서자, 어제 생각 없이 넘어간 징조들이 눈에 밟혔다. 하루의 기억이 없어진 그 날. 자신이 바로 알아챘어야 했다. 무심코 넘겨버린 그 순간이 이런 파장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평화에 물들여져서 위기를 판단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물러터진 것일까. 어느 쪽이든 잘못됐다는 생각만 들었다. 고백하기 전인 케일에게 사랑을 속삭이지 못하게 되고 연인에게 자각 못 하는 상처를 주었다. 보필해나가는 호위로서도 사랑하는 연인으로서도 케일 앞에 당당히 서지 못한다.
“거기 있지 말고 들어오지 그래.”
상념을 깨뜨린 건 다름 아닌 케일이었다. 언제 문을 여셨지? 오늘따라 얼이 빠져있다는 걸 자각하고선 급히 일어섰다.
아까부터 케일에 대해 지독한 자학을 가지고 있던 최한은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다. 실수로 연인의 눈으로 보지 않을까. 케일님 앞에서 불안하게 만들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을까. 여러 생각을 자아냈다.
“최한.”
“..네.”
“너는 멈춰있나?”
케일의 의문 모를 말에 최한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케일의 암갈색 눈을 바라봤을 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는 것을 인지했다. 문득 과거에 라크를 보며 케일님께서 말을 내뱉으란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서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 걸까 생각을 해봐도 잘못한 이는 말이 없다는 말답게 자신은 케일에게 내뱉을 말이 없었다.
“아니면 나아갈 것인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답은?”
“......나아갈 겁니다.”
당신을 위해서.
예전부터 케일님을 지키기 위해서 강해졌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나아갈 것이라 다짐했다. 자신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운 거지?”
“나아갈 너보다 강한 게 무엇이지?”
“너는 나아가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
“너는 시선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지배하는 쪽이야. 두려워 하지 말고. 제대로 바라보고 나아가라.”
케일의 말에 최한은 다시 케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케일은 최한에게 너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고, 가능성이 있기에 당당해지라고 한다. 어쩌면 오만하면서도 진부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케일의 말은 담백하게 자신의 진심을 건드려 왔다.
조용히 불씨만을 남겨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건만 케일은 자각 없이 숨기려는 모닥불에 기어코 장작을 집어넣는다. 쉬이 꺼지지 않을 것이란 걸 최한 스스로 자각하고선 케일의 암갈색 눈동자를 피하기 바빴다. 지금도 나아가는 최한이 케일에게 약해지는 건 근원적인 존재이기에 고칠 수 없는 난제이기도 했다.
케일 또한 난제를 피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한 말은 먼저 나서고 수렴해 온 최한이 저렇게 시선을 피하기 바쁘니 당황스러운 감정밖에 들지 않았다. 얘 왜 이래..? 최한은 자신이 기억을 잃었기에 두려워했다. 어쩌면 이때의 자신이 무엇을 계획하거나 비밀리에 무엇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게 무산되고 최한 혼자서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기억 잃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힘내라는 식으로 말했더니 더 눈을 피한다. 설마 지금의 나 대체 무슨 무서운 일을 벌였기에 저렇게 자신 없어 하는 거야..?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꺼내기 전에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에 의해 속으로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일시적인 기억 상실인 듯합니다. 보통 사고를 당하셨거나 감당하기 힘든 심리적인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전쟁을 앞둔 병사들의 징조로 보이죠. 혹시 그런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이 있냐고?
치료사는 케일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케일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불러서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고요한 시선을 가진 치료사의 말에 비아냥과 악의가 없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굳이 마음속으로 답하자면 수도 없이 많았다. 케일 헤니투스라는 사람은 늘 자신을 망나니라 자칭하고 가끔 나태한 삶을 즐기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모든 사람이 알았다. 세상은 1할의 평화와 9할의 불안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리고 그 세상 속 사람들은 그곳에서 티끌만큼 작은 평화를 갈구하고 욕심내왔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일은 세상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안을 없애 그 빈자리에 평화를 채우시는 분이었다. 불안 속에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구제해 그들에게 머물 자리를 주는 그런 대단한 분이었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지 않으면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왔다. 케일이기에 가능하다 생각했다. 자신들을 구제해준 신에게 기도하듯이 조금은 그런 생각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피를 토할 때 심장이 철렁하고는 했지만 지금은 그런 무리를 주지 않으니 괜찮다고만 생각했다. 그의 심리적 부담에 대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아니 생각은 했으나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케일에게 그 극단적인 상황이 들이닥쳤다.
아무 말 없이 어두운 그들을 보면서 치료사는 다음 말을 잇는 것이 그들에게 상처임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치료사이기에 말을 이어나갔다.
“일시적인 기억 상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더 기억상실이 진척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추억을 상기시키거나 기억으로 유도하면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기억상실을 중단시키는 방법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치료사의 입에 발린 소리라며 치료사의 능력을 부정하기에는 치료사는 너무나도 다정했다. 스스로 잘못이라 자책하게 만들지 않으려 자신의 잘못이라 결정짓고 사과를 해오는 모습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말할 자격이 없었다.
그들은 두 갈래의 길이 생겼다. 체념과 불복. 케일이 계속 기억을 잃을 것이라는 생각 아래에 행동할 것인가. 그가 다시 기억을 되찾을 것이라는 생각 아래에 노력할 것인가. 모두가 불복을 선택할 때 최한은 선택해야 했다. 희망을 품을지 새로운 추억을 남길지.
헤니투스 저택에 가서 가족을 만나보자. 현재 어떤 상황이며 어떤 활약을 했는지 이야기를 하자. 최한을 제외하고서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큰 공로를 받아 휴가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기억 이후의 정착지를 돌아다니는 것은 꽤 곤란했다. 그렇기에 자잘한 것들을 모두 신경 쓰며 모두가 그의 앞에서 웃으려 노력했고 희망을 품었다.
거기서 최한은 불복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두 번의 기억을 연달아서 본 그는 이미 점점 그가 기억을 잃어간다는 결론은 이미 지어버린 지 오래였다. 자신도 기억을 되찾도록 해볼까-라는 생각은 해봤지만 언뜻 본 케일님의 표정에서는 곤란함과 착잡함이 뒤엉켜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을 보고선 포기했다.
‘케일님 앞에서 적어도 저라도.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있겠습니다.’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고생이 무색해지게 케일은 또다시 기억을 잃고 말았다.
케일에게 기억을 되찾게 하려고 고군분투를 했던 사람들은 주저앉았다. 자신들의 노력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도 모자라 더 나쁜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으니깐. 여기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후자의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최한조차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름다운 저택에는 그와 걸맞은 분위기를 되찾지 못했다.
“케일님.”
“아. 최한.”
조용한 저택 복도에 홀로 걷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평소보다 느슨한 옷차림에 낯설어하기도 전에 최한은 습관처럼 케일의 이름을 담았다. 자신이 입에 담은 이름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나서야 앞에 있는 이가 케일님이란 것을 직시했다. 케일님은 나른한 눈빛으로 자신을 느릿히 시선을 두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를 원망하나?”
무슨 말을 담아야 할까. 고민하기도 전에 나온 케일의 말은 최한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케일의 입장에서는 봤을 때 자신이 알고 있던 이들의 변화에 적응하기도 전에 기억상실의 통보를 받고 죄책감에 휩싸여 조금씩 케일을 피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케일은 불특정 대상의 피해자나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내뱉어야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저의를 모르겠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자 그것을 간파한 케일은 말을 이어나갔다.
“시끄럽고 조용하게 만들었으니깐 말이다.”
저택을 시끄럽게 하고 조용하게 만들었다.
케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였다. 케일의 병으로 소란이 나고 병을 고치고자 모두가 흩어지거나 죄책감에 조금씩 피해갔다. 담담하게 내뱉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암갈색 눈동자에 무엇을 담았을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한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다. 케일님의 탓이 전혀 아니니 자책할 필요 없다. 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음에도 그는 케일의 모습을 보고서 위축되서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최한은 무어라 말을 해야 케일님이 상처를 받지 않으실까 고민을 했다. 조용히 기다리는 케일의 모습에 답을 반드시 해야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원망합니다.”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내뱉어서는 안 될 말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뱉었다. 이 말은 ‘케일님 곁에 있는 호위무사’가 아니라 ‘케일님을 사랑하는 연인’의 감정을 중점적으로 둔 진심이니깐.
바로잡고 싶은 점이 있다면 시끄럽고 조용하게 만들었다는 이유가 아니란 점이었다.
“제게 사랑을 가르쳐준 케일님이. 저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셨던 케일님이 제게 점점 멀어지는 것이 원망스럽고 두렵습니다.”
“제 앞에 이리도 가까운 케일님이 제 손짓에 멀어질까 두렵습니다.”
“사실 케일님의 잘못은 전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타나는 이 감정을 무어라 지칭하지 못해서 원망이라고 정해버린 것에 죄송합니다.”
케일이 기억을 잃어갈수록 케일은 연인이라는 존재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아득한 어둠을 닮아 곧잘 밤에 나오던 최한이 별이 어디서 떨어졌을지 가늠도 못 하도록 빼곡히 수놓아진 별들의 끝에 케일이 서있었을 때 그는 어딘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영웅. 자신의 전설. 자신의 가족. 자신의 짝사랑. 케일 헤니투스라는 존재에 이 열기가 케일의 붉은 머리카락 탓이라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서 자신을 속삭였고 사랑을 토해냈다.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간 추억과 뒷받침한 사랑들이 제 손안에서 사그라져 간다. 기억이 점점 사라진다면 끝내 케일은 최한을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최한은 처음 알았던 사실에 당황해하는 케일을 쳐다보지 못하고선 시린 눈을 참아냈다.
자신은 케일님과 멀어지는 것이 두렵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케일님이 원망스럽고 사랑하고 있다.
그 상황에 버티지 못한 한 사람은 도망쳤다. 그게 누구인지는 서로가 인지하지 못했다.
‘케일님. 제가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걸 알지만..그래도. 그래도...사랑하고 있습니다!’
‘응. 알고있어.’
‘...네?’
‘설마 내가 좋아하는 사람 눈치도 못 본다고 생각해?’
‘네? 네에?!’
나도 널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말이야.
어두운 밤에 제일 빛난다고 생각한 별보다 눈에 띄는 케일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환한 미소를 독점했을 때. 아직도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그런. 정신적인 사랑.
누구에겐 현실이 누구에겐 꿈이 되었다.
“최한님. 최한님!”
“무슨 일이십니까?”
꿈이 현실 같고 현실이 꿈같아서 최한이 현실 같은 꿈에 벗어나지 못하자 한스의 외침이 대신 그를 깨웠다. 하지만 깨웠다고 보기에는 다급한 목소리에 급히 일어나서 자신의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숨을 헐떡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한스가 있었다. 한스는 자신의 눈을 맞닥뜨리자 숨도 제대로 고르지 않고서 외쳤다.
“케일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저택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좀 전에 헤니투스 영지를 둘러보고 싶다는 이야기는 듣기는 했는데 그 상태로 또다시 기억을 잃으시면..”
최한은 제대로 옷을 추스르지 못하고 바로 뛰쳐나갔다.
*
정신이 드니 헤니투스 영지 내에 있었다. 이제 영지에 벗어나려고 하기는 했지만, 저택 내에 있었지 않았나? 내가 자각하지도 못한 채 헤니투스 저택에 벗어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더라? 그래. 고대의 힘을 얻으려고 빵집에 빵을 사려고 했지.
주변을 둘러보니 영지민들이 흘끗흘끗 시선을 두는 게 느껴진다. 망나니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하기에는 반짝이는 눈이 부담스러워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헉. 허억. 뭐야 진짜.”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면서 긴 머리를 목 뒤로 넘겼다. 자연스럽게 넘기고서 머리가 길다는 걸 알아챘다. 고대의 힘을 얻는 과정에 작은 부작용인가? 아니 그러기에는 영탄에는 그런 부작용 같은 건 없었지 않나. 자신의 낯선 변화에도 몸은 익숙하다는 듯 침착하게 반응하게 되는 게 묘하게 불쾌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영지의 모습에 고대의 힘이 담긴 나무를 찾으려 헤매다 누군가 자신을 뒤로 이끄는 힘에 힘없이 이끌려 갔다.
가뜩이나 힘없는데. 여기에 유명한 망나니를 막 건드는 사람이 있었나? 고개를 살짝 올려 누구인지 확인하자 저절로 눈이 크게 뜨였다.
“최한?”
아직 만나지 않는 영탄의 주인공이 먼저 자신에게 다가왔다. 영탄의 서술과는 다르게 멀끔한 차림에 유순한 표정으로. 이런 만남이 아닐 텐데?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꽤나 당황했다. 원작이 벌써 무너지는 건가?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먼저 말을 꺼내려 했지만 먼저 최한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제는 계속 케일님 곁에 있을 겁니다. 케일님이 저를 모르신다고 해도 모든 것은 케일님을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니..절 떠나지 말아주세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말을 내뱉기에는 애절한 최한의 말이 손끝을 저리게 만들었다. 자신의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왜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거지? 그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하기에 처음 보는 최한은 자신에게 그리운 연인을 보는 마냥 슬픈 미소를 짓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