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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은 지금, 상당히 불만족스러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케일 님이 또다시 다쳐오셨기 때문이다. 물론 케일이 다쳐 오는 것이 하루 이틀이겠느냐마는, 그럼에도 최한은 상당히 불쾌했다. 그것이 비단 최한만의 경우는 아니겠으나,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표정에 완벽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은 케일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굳어 있었다.

 

“......”

“…그, 최한, 내가 뭐 잘못했나?”

“…아닙니다, 케일 님.”

 

때문에, 케일 주변의 사람들은 지금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다. 케일의 앞에서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최한은 처음 봤다. 그 말은 최한이 처음으로 케일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도, 저렇게 선명하게.

 

하지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케일의 지금 몰골을 보면, 이해가 갔다. 케일은, 한 마디로, 붉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다쳤음에도 살아서 저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붉었다. 그의 머리카락보다도 깊으면서, 동시에 한없이 얄팍한 붉은 물이 상처에서 배어 나와 옷을 적셨고, 몸을 타고 흘렀다. 희고 화려했던 옷은 붉게 물들어 검게 굳어갔고, 곳곳이 찢어져 이것이 과연 그가 나갈 때 입었던 옷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비크로스의 얼굴이 그 꼴을 보고 굳어졌지만, 그게 케일이 다쳐서만은 아닐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만큼 그는 만신창이었고, 몸에도 성한 곳이 없었다. 무언가에 심하게 공격당한 모양새였다. 거기에 눈은 실핏줄이 터져서 붉었고, 코 주변과 입가에도 붉은 물이 잔뜩 말라붙어 있었다. 가득히. 때문에 그의 얼굴도, 옷도, 몸도 꼭 그의 머리칼과 같이 붉었다. 더 검었고, 더 생명의 빛을 잃어가는 모양이었으나 어찌 되었건 그리했다.

 

그 꼴을 처음 본 것은 라온이었다. 라온 말로는, 어느 순간 약한 인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예전에, 자신이 성장통을 겪었던 때처럼 케일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황해서 케일을 엄청나게 찾아다녔는데, 갑자기 다시 케일이 느껴지는 곳에 갔더니 저런 모습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라온은 케일을 데리고 돌아오면서 크게 울고 있었고, 당황한 모양이었다. 인간이 싫다던 말은 어디로 갔는지 케일이 없어지기라도 하면 죽을 모양새로 울고 있었다.

 

“이, 인간! 약한 인간이, 약한 인간이…….”

 

케일 헤니투스가 그 몰골로 돌아온 순간 헤니투스 백작가는 뒤집어졌다. 당연하다. 잠시 산책하러 나간다며 라온과, 제 일행 중 거의 제일 강한 라온과 함께 나갔는데도 저런 꼴이 되어 온 것이다. 물론 케일의 산책의 스케일이 조금 큰 경우가 많긴 했지만, 이번에는 겨우 어둠의 숲이었다. 라온이 잠시 가보고 싶다고 졸라서 굳이 다른 사람 안 챙기고 둘만 다녀온 것이었다. 케일의 부모님은 당연히 그냥 산책인 줄 알았고, 론과 최한, 로잘린은 라온이 같이 간다기에, 또한 케일이 어둠의 숲 정도에서 죽진 않을 정도의 고대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케일이 원해서-정작 자신은 그냥 귀찮으니 라온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지만-따라가기를 포기했는데 케일이 그 꼴이 되어 온 것이다. 가끔은 라온과 케일이 따로 외출을 하고 싶은 날도 있겠거니, 하고 일행의 입장에서는 유리나 다름없을 정도로 약한 케일을 호위도 없이 나가게 그냥 뒀는데, 갑자기 저렇게 된 것이니. 당연히 화가 나고 걱정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 최한의 상태는 이상했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케일은 곧 죽을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사실 아는 사람의 눈에도 그렇지만. 하지만 집에 오자마자 최상급 포션을 들이부어서 그런지, 현재 케일의 몸에는 상처가 전혀 없었다. 침대에 편안히 누워 있었고, 말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지금은 많이 진정했다. 물론 아직 옷과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닦아내면 될 일이었다. 뛰쳐나가기 직전이었던 론조차도 지금은 케일이 어디 불편하진 않을까 걱정을 하며 살피기만 했다. 케일이 어느 정도 평소의 상태로 돌아온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최한?”

 

그런데도 최한이 진정하질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케일의 앞에서, 저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무표정인 채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최한 자신도 제가 지금 화를 덜 억누른 상태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케일 님을 해한 이들을 찾으러 뛰쳐나가지 않은 게 어딘가. 당장 찾아가 죽여도 모자랄 놈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하다고 자신했다. 입을 열면 케일 님을 그렇게 만든 이들을 찾겠다며 억지를 부릴까 입도 최대한 열지 않았다. 왜 그리 태평하신지 물으며 은인에게 무례를 범할까 일부러 입을 더 꾹 다물었다. 물론 화가 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케일 님을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향한 것은 걱정이었으며, 애정이었고, 내보낼 길을 찾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정도, 겨우 이 정도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괜찮다고 여겼다. 전에도 한 번 제가 없을 때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에 몸부림치며 돌아왔던 케일이 아니던가. 최한은 이정도면 지금으로선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누가 봐도 그것이 그저 케일을 향한 분노라는 것이 문제였다. 케일의 머릿속을 지금 한 마디로 표현해보자면, ‘쟤가 왜 이래?’일 것이다. 그도 그럴게, 최한은 항상 케일 앞에서는 순하고 선한 고등학생일 뿐이다. 말도 잘 듣고. 그런데 그 애가, 갑자기 자기를 굳은 얼굴로 빤히 바라본다 생각해 보자. 심지어 그 애가 소드마스터다. 케일로서는 솔직히 이쯤 되면 멀쩡히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케일 님.”

 

케일은 최한을 바라봤다. 최한의 굳은 표정이 퍽 어색했다. 제 눈에만 어색했다. 다른 사람들은 평소의 모습이 더 신기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케일은 침을 삼켰다. 아, 목마르다. 물 좀 마시면 좋겠는데. 포션 말고.

 

“……. 아닙니다, 쉬세요.”

 

최한은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고, 그제서야 일행도 하나 둘 나가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것은 항상 케일의 방에 있던 온, 홍과 왜인지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라온, 그리고 론이었다. 론은 사용인들을 불러 케일의 몸에 말라붙은 피를 닦아내고, 옷을 새로 입혔다. 케일은 아직도 아까 다쳤던 곳들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얌전히 론이 시키는 대로 하고선, 재빨리 다시 침대에 누웠다. 물론 바로 치유했으니 지금은 아프지 않아야 정상이겠지만, 아직도 아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때문에 케일은 되도록 움직이지 않기를 택했다. 침대에 편안히 눕자 옆에 온, 홍이 파고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아직 제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여전히 얼굴에 눈물이 잔뜩 고인 라온이 제게 뛰어들려다, 조심스레 다가왔다. 제가 다친 것을 아직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그러곤 울기 시작했다.

 

“야, 약한 인간.. 괜찮나? 안 아픈가...?”

“어, 괜찮다.”

 

아무래도, 잠에 들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최한은 방을 나서고도 케일의 방 주위를 떠나지 못했다. 다른 일행이 나올 동안 방문 바로 옆에 서 있었으며, 보다 못한 로잘린이 뭐라 하기 전까지 그대로 방문 앞을 무언가를 후회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말하자면, ‘내가 케일 님을 지켜 드렸어야 했는데.’일 것이다. 아까의 무표정이 도리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정이 풍부한 표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미안해서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평소, 표정이 없는 그를 더 자주 보던 사람들에게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 저건 누가 봐도 케일을 마주쳤을 때를 위한 표정이다. 즉, 최한은 케일이 방에서 나오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 문 앞에서 왜 그가 기다리겠는가? 후회하고 사과하고 걱정하는 말을 하고 싶었으면 아까 하고 나왔으면 될 일이다. 그리고 보통 최한이 저런 류의 생각을 할 때에는, 더 강해지겠다며 검술 수련을 하러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렇게 문 앞에서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서성이는 대신. 그런데도 굳이 최한은, 케일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하며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즉, 케일을 방에서 못 나오게 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눈치 빠른 로잘린이 결국 최한에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케일 공자는 아파서 못 나올 거라며 최한을 방 문 앞에서 치웠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로잘린도, 라크도 당황했고 로잘린은 결국 최한을 저택에서 그대로 끌고 밖으로 나왔다. 물론 최한은 소드마스터니까, 로잘린에게 끌려가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순순히 따라갔다.

 

“최한.”

“왜.”

“너 무슨 생각이야?”

 

로잘린은 인상을 쓰고 최한을 바라봤다. 최한은 별로, 잘못한 게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기를 원체 못하니 당연히 연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로잘린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왜 케일 공자를 방에서 못 나오게 하려고 해?”

 

최한은 여전히,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거야, 당연하잖아. 다치시는걸. 다치지 않으려면, 방에 계속 계셔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방에 가만히 계시게 하려고. 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최한의 모습을 바라보며 로잘린은 목이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아니. 그거……. 아무리 그래도 감금 아닌가, 그 정도면? 여전히 최한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모양새다. 아니, 그래. 최한은……. 17살에 소드마스터면, 역시, 뭔가 이상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최한이 어딘가 어긋나 있는 건 그냥 지금까지 너무 고되게 수련해서 그런 거야, 그래.. 라며 로잘린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 저기, 최한, 그 생각. 케일 공자한테 말은 한 거지?”

“아니?”

 

최한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고선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이건 케일 님을 지키는 일이잖아. 그리고 나한테 지키라고 하셨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최한의 모습에 점점 로잘린은 어이가 없었다. 진짜..? 정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로잘린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무언가와 싸우듯 결연한 표정을 했다.

 

“잘 들어, 최한.”

“어? 응. 왜?”

“너, 케일 공자를 좋아하지?”

 

최한의 얼굴이 새빨개진 건 순식간이었다.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그대로 붉게 물들어갔다. 멍하니 정신을 놓은 듯 보이다가도 마치 만화에 나오는 것과 같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전형적인 대사도 잊지 않았다. 누가 보면 만화나 소설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겠어.

 

“그, 그걸 어떻게..?”

“하아......”

 

로잘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뻔하지……. 딱 보니까 케일 공자가 첫사랑인 것 같다. 그래.. 17살에 소드마스터니까.. 사랑은 해본 적도 없을 거고……. 사람의 마음도 잘 모를 거고, 뭐가 잘못됐는지도 잘 모를 수 있지. 로잘린은 굉장한 답답함과 이걸 어떻게 말해야 알아들을지에 대한 고뇌를 시작했다. 그 때문에 그걸 그대로 보면서 로잘린의 대답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최한은 상당히 초조했다. 설마, 케일 님이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최한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올라선, 종잡을 수 없도록 부피를 키워 나갔다.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 일부러 대신 물어봐 달라고 하신 건 아닐까? 거짓말을 했어야 하나? 내가 케일 님을 좋아해서, 이제 밥값 하지 말라고 하시면 어쩌지……. 그 시간 케일은 그런 생각은 하나도 없이 태평하게 평균 9세들과 놀아주고 있었지만, 최한은 하나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하아……. 진짜, 그, 최한.”

“……. 응..”

 

최한은 마치 버려지기 직전의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뭐지? 왜 케일 공자 앞에서나 보이는 모습이야. 로잘린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있지, 너.. 평소에 엄청 좋아하는 티 나는 건 알고 있니?”

 

얼음.

최한은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티 난다고..?’를 표정으로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 몰랐어?”

 

로잘린도 놀란 눈이 되었다. 일부러 티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평소에 티 내 놓곤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시 생각했다. 17살. 소드마스터. 케일 공자가 첫 사랑. 그래, 그럴 수 있지.

 

“케일 공자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알고 있을걸.”

 

케일 공자는 이런 부분에서 눈치가 없으니까.

 

“......”

 

최한은 말이 없었다. 얼굴이 아직도 붉다는 것만 빼면 크게 문제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로잘린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최한, 아무리 좋다고 해도. 지키겠다고 가두면 안 되거든?”

 

의문.

 

“왜?”

 

케일 공자는 왜 최한을 선하다고 평했을까. 정말로 이런 생각을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며 순수하게 질문하고 있는데, 이게 정말로 선한 걸까? 아니면 사실 케일 공자도 최한을 사랑하는 걸까? 그래, 콩깍지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아. 로잘린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야 당연히, 케일 공자가 싫어할 거니까.”

“케일 님이?”

“당연하지, 사람을 갑자기 가두면 어떡해.”

“하지만 케일 님은 너무 무리하셨는데…….”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가두면 안 되잖아.”

“케일 님은 누가 가두기라도 하지 않으면 또 나서서 뭔가 일을 하실 거잖아. 쉰다고 하시면서, 또 무리하실 거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누가 이유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어? 로잘린은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니, 나름 맞는 말이긴 하다. 케일 공자라면 분명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기는 하지만……. 아니, 그렇다고 해도 가두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케일 공자 방이 딱히 사람이 못 살 곳도 아니고, 나쁜 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로잘린은 세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설득 당할 뻔 한 생각을 털어냈다. 정신 차리자, 이건 좀 아냐. 물론 케일 공자가 많이 무리를 한다곤 하지만, 그래도 차라리 집에 있을 수 있게 알베르 왕세자 저하께 부탁을 드리고 말지.

 

로잘린은 다시 최한에게 제 의견을 말했다. 그리곤, 제가 알베르 저하께 부탁드려 케일이 당분간 쉴 수 있도록 해 볼 테니 좀 참으라고 했다. 설득에 꼬박 한 시간이 걸렸고, 알베르 저하께 상황을 설명하자 바로 케일에게 다시 영상을 연결하려고 끄려던 것을 겨우 말렸다. 그러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굳이 안다고 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케일 공자가 기분 나빠 할 것 같으니까. 제가 할 일이 있어도, 도움이 되고 싶어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다친 것 때문이라면 분명 케일 공자는 화 낼 위인이었다. 적어도 로잘린이 보기엔 그랬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로잘린에게는.

 

* * *

 

지금 최한은, 조금, 억울한 상태였다. 자신은 그저 케일 님을 위해서였다. 그래, 그랬었다. 근데 왜?

 

어차피 케일 님은 쉬실 거고, 위험하지 않으실 텐데.

 

왜 아쉽지?

 

최한은 해소되지 않은 갈망을 느꼈다.

고스란히 제 머리에 남아 그를 내리누르는 갈망을 그대로 무시했다. 추악한 감정을 무시했다. 애정의 하나의 형태임을 부정했다.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던가. 이미 케일 님은, 너무 힘드시니까. 내가 말씀드리면 곤란해 하실 테니까. 고민하셔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나 버리니까. 물론 고민도 없이 이미 결론이 나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르는 것 아닌가. 최한은 자신이 케일 님께 폐가 될 여지를 지우고 싶었다. 세상에서, 완전히.

 

그렇기에 눈감았고, 무시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되어갔다. 이젠 케일이 갑자기 다쳐온 것은 그저 하나의 사고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가 다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여전히 케일은 자주 무리했다. 자주 다쳤다. 자주 일을 했고, 제 몸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자주 앞으로 나섰다. 그릇이 커졌다는 건 들었지만, 유리그릇이다. 겨우 유리다. 그것도 작은 그릇을 녹여서 늘리고, 또 늘여서 억지로 크게 만든 그릇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거의 다른 점이 없었다. 꼽자면, 마나 폭탄은 라온이 막을 수 있다 정도겠지.

 

최한은 여전히 갈망했다.

 

무엇을?

케일을.

 

정말 그냥 케일을 갈망한 것인가?

 

최한은,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제가 그저 케일 님을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제가 그에게 하는 갈망이 정상적인 애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제가 품은 것이 그것보다 더욱 추악한 감정임을 알았다. 은인에게 가져서는 안 될 감정임을 알았다. 아니, 그것이 은인이 아니더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억제할 수 없었다.

 

최한은 케일을 가두고 싶었다.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온전한 케일로.

 

최한은 자신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느꼈다. 맨 처음 자신이 케일 님께 존경이라는 포장지로 감춰버린 사랑을 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보다 더 음습하고 검은 감정을 느꼈다. 최한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음과 동시에 이해했다. 상반된 평가는 그를 사고의 나락으로 이끌었다. 최한은 자신과 마주해야 했다. 이해할 수 없다며 끝까지 부정하는 자신과 그럴 만도 하다며 끝없이 합리화하는 자신을 마주했다. 둘 다 베어 없애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최한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까마귀가 울었다. 백조가 날갯짓했다. 검은 새가 계속 울었다. 백조는 고고히 헤엄쳤다. 알게 되었다. 까마귀는 백조를 이길 수 없다. 때문에 도망쳤다. 몸을 숨겼다. 백조가 남았다. 몸짓 하나하나가 언어가 되었고 의미를 품었으며 의지를 전달했다. 지배했다. 선으로. 완전히 짓누르고, 짓이기고, 부수는 대신.

 

최한은 이해할 수 없다며 부정하는 자신을 남겼다. 합리화하는 자신을 가뒀다. 힘을 키우지 못하도록 선으로 덮었다.

 

불안정했다. 케일도 최한도, 전부 불안정했다. 케일은 누가 봐도 제 몸을 돌보지 않았다. 쉽게 다쳤다. 주위에 강한 이들이 많았고, 아무리 자주 그들에게 부탁하고 밥값 하라며 일을 시켜도 결국 필요하다 생각할 때에는 자신이 나서버렸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맡기면 조금 힘들더라도 성공할 수는 있을 일을 그는 그가 무리하는 대신 더 수월하게 해결했다. 그래서 그는 피를 흘렸다. 고대의 힘이 아무리 많고 강하다 해도 케일은 약하니까. 그런 광경을 계속 본 최한은 미칠 지경이었다.

 

케일 님. 당신은 왜 저를, 왜 제 은인조차 지킬 수 없게 만드십니까.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케일 님이, 제게, 될 수 있다고 해 주셨는데.

왜 그럴 수 없는 자로 만드는 것 또한,

당신입니까, 케일 님.

 

최한은 불완전한 어둠을 지녔다. 더욱 더 깊은 절망으로 추락하지 않았기에, 그는 완전해질 수 없었었다. 그를 붙잡고 절망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사람이 케일이었고, 그의 곁에서 자리를 지키던 이들이었다. 최한은 세 번째 집을 얻었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고자 했다. 은인을 지키고자 했다. 제 목숨을 다해서라도, 지키고자 했는데. 왜, 왜 저를. 왜!

 

최한의 어둠은 결국 완성되었다.

 

케일은 구원자가 되지 못했다. 그는 어린 아이들이 절망과 시련으로 강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지만, 그 어린 아이들 중 하나인-정신과 무력은 그렇지 못하나 케일에겐 영웅의 탄생이라는 소설 속에서 결국 시련을 매개로 고통스럽게 성장하는 순한 어린애일 뿐이었다―최한이 그렇게 되는 것은 막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계기가 되었다.

 

최한은, 케일을 위해 제 목숨을 온전히 바칠 수 있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장애물을 부수고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의 곁에 섰다. 그리고 매 순간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그의 검이 되었다. 최한을 죽일 수 있을 이도 거의 없었지만, 그런 존재를 만났을 때조차, 그 자신의 명과 함께 케일 님께 바치려 몸을 움직이던 사람이 최한이었다.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되었고, 지키기 위해 몇 번이나 몸을 움직이고, 던지고, 채찍질했지만, 결국 그는 케일을 막을 수 없다. 결국 지킬 수 없다. 절대로, 결코.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 까지 바라지 않았다. 그에게 자신이 의미를 갖길 바라지 않았다. 주제넘은 짓이었다. 옆에서 지킬 수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만족하고자 했다. 폐를 끼쳐선 안 됐다. 은인에게 도움이 되고, 이번만은 이곳을 마지막 집으로 삼으려 했다. 다시 잃어서는 안 됐다. 다시는, 다시는 잃을 수 없다. 다시는 다치게 할 수 없다. 생채기 하나 없이 온전하게 지키고 싶었다. 자신이 망가지더라도 그는 지켜야 했는데, 케일 님, 케일 님.

 

최한은 지키지 못했다.

 

수도 없이 케일은 다쳤다. 피를 토해냈다. 몸이 들썩이고, 이내 축 쳐져서 쓰러지고,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을 먼저 챙겼다. 그 사람을 지키고자 했으나, 최한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지켜보고 그의 말을 이행하는 것뿐이었다. 무력했다. 케일이 고대의 힘을 안 쓰게 만들어야 그를 지킬 수 있을 터인데, 최한은 그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때문에 절망했다. 약한 자신에게, 무력한 자신에게 절망했다. 절망은 까마귀를 적셨다. 그리고 어둠은 그 절망을 집어삼켰다.

 

까마귀가 울었다. 까악 하고 크게도 울었다. 백조는 참새가 되었다. 참새가 울었다. 울음소리가 까마귀 소리에 묻혔다. 까마귀 소리가 덮었다. 메웠다. 채웠다. 앗아갔다. 작은 새는 소리를 잃었다. 큰 새는 덩치를 키웠다. 몸집이 커지고, 커지고, 커졌다. 제 소리를 양분으로 크는 것만 같았다. 자리를 차지했다. 발이 땅을 밟았다. 땅이 크게 울렸다. 지배했다.

 

최한은 합리화를 받아들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숨을 조였다.

 

결국 일이 난 것은 그 다음 주였다. 그날 케일은 알베르를 만나고 돌아온 길이었다. 영상 통신구로 자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해왔지만, 한 번쯤은 만나서 정리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귀족들 앞에서. 케일은 그 말을 수긍했고, 왕궁에 가서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앞으로 고생이 많겠다 싶으면서도 이십대 후반부터의 백수 라이프를 꿈꾸며, 가슴에 품은 황금패에 위안을 얻고 집에 돌아와, 제 방에서 잠이 들었을 터인데.

 

“……. 최한?”

“아, 깨셨어요, 케일 님.”

 

갑자기 최한과 짱돌 저택에 있는 것이다.

 

케일은 상황을 정리했다. 우선, 자신은 편안하게도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고, 주위에 온, 홍, 라온은 없었다. 제 곁에서 웬만해선 떨어지질 않던 애들이고, 라온은 무려 드래곤이다. 눈앞에 보이는 건 최한뿐이다. 이 말은 최한이 자신을 데려온 것이긴 하나 라온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케일은 의문스러웠다. 최한이 라온한테 걸리지 않고 날 데리고 나올 수 있나?

 

“온, 홍이랑 라온은?”

“다 집에 있어요, 케일 님.”

 

여기도 집은 집인데.

“나는 왜 여기 있고?”

조금 찌푸린 얼굴.

 

최한은 웃었다. 미친 듯이 소리 내며 웃었다는 뜻은 아니고, 그냥 그대로 미소 지었다. 17살의 선한 얼굴에 어울리는 순진해 보이는 미소가 떠올랐다. 케일은 그 와중에도 웃는 게 선하다 따위의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찰나의 시간이 몇 분처럼 길게 느껴지고 최한이 그대로 웃는 낯으로 입을 연다.

 

“그야, 케일 님이 다치시는 게 싫으니까요.”

 

눈가에 서린 것은 의문.

 

“처음에는 이럴 생각은 없었어요, 케일 님.”

“제가, 제가, 지켜 드려야 하는데, 싶어서. 그래서 방법을 찾았어요, 케일 님. 저는 그냥, 지켜 드리고 싶어서.”

“……. 그래서?”

“그래서, 방법을 찾다가.. 어느 날 알았어요, 케일 님.”

고개를 기울이고, 무언의 의문과 이어질 말에 대한 허락.

 

“케일 님이 위험한 일을 못 겪으시게, 가둬 버리면 되잖아요?”

미소.

 

최한은 여전히 환하게 웃었다. 아니, 아까보다 더 짙은 미소였다.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선해 보이는 미소. 케일은 당황스러웠다. 첫째로 최한이 너무 거리낌 없이 저런 말을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너무 기뻐 보이기 때문이다. 쟤가.. 원래 이런 애였나? 아무리 무력이 강하고 힘들게 살았다고 해도, 아무리 가차 없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삐뚤어지지는 않았는데. 케일은 이것이 저로 인한 것임은 몰랐다.

 

“그런데, 맨 처음에는 로잘린이 말리더라고요. 어차피 이것도 지키는 일인데, 케일 님을 안전하게 만드는 일인데 왜 안 되는 건가 싶어서, 우선 참았어요. 로잘린이 케일 님의 의사를 알아야 한다고 하니까.”

“나는 날 데려와도 좋다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네, 케일 님. 하지만, 케일 님은 피곤한 건 싫어하시잖아요. 그리고 앞으로는 엄청 피곤해지실거고, 다칠 일도 많으실 거고요.”

 

목소리와 표정이 나타내는 것은 걱정.

 

“그래서.”

“그래서 모셔왔어요, 케일 님. 여긴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제가 한 일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는 환한 미소.

 

케일은 말문이 막혔다. 원래부터 최한이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제가 밥값 하라고 할 때부터 알았지만, 역시 이곳의 최한은 뭔가 달랐다. 하지만 이정도로 달라졌을 줄은 몰랐다. 케일은 뭐라 더 할 말을 찾을 수 없어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최한은 그것을 기점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케일 님,”

끄덕이고.

“제가 왜 이렇게 했나 싶으시죠.”

“어.”

“케일 님.”

“어.”

“케일 님은, 왜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세요?”

 

다시 의문.

 

“케일 님, 저는, 저는.. 케일 님 덕분에 돌아갈 곳이 생겼어요.”

“케일 님이, 저를 거둬 주셔서, 제가, 제가.. 다시, 지킬 곳이 생겼는데.”

 

톡.

 

“돌아갈 곳이 생기고, 지켜야 할 사람이, 지켜야 할 곳이 생겼는데.”

 

톡.

 

“왜 정작 저에게 가장 지켜야 할 사람인 케일 님은, 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해주신 케일 님은, 저를, 저를.. 저를 지키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케일 님은, 왜, 왜.”

“저를, 지킬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세요, 케일 님.”

 

다시 톡, 톡.

 

“케일 님, 케일 님. 케일 님은, 돌아갈 곳이 없지 않잖아요. 케일 님 옆에 사람이 있잖아요. 온도, 홍도, 라온도, 론도, 가족도 있고, 다른 분들도 케일 님을 다들 좋아하고, 그리고. 그리고... 저도, 저도, 있는데. 왜, 케일 님은,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세요?”

 

팔이 올라가고, 눈가를 옆으로 닦아내고.

 

“케일 님이, 다른 사람들을.. 신경 써 주셔서, 그러신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케일 님이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고 소중히 여기시는 만큼, 저희한테도, 케일 님이.. 신경 쓰이고, 소중한데, 왜.”

 

아래로 향하는, 강아지 같은 눈.

 

“케일 님, 케일 님... 돌아가야 할 사람을, 두시면, 두시면 안 될까요?”

입을 닫았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케일 님, 그 사람이.. 제가 되기까지는 바라지 않아요. 저는, 저는.. 케일 님이, 더 이상.. 그렇게 몸을, 막 쓰지만 않으시면.. 제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케일 님. 그러니까..”

“뭐?”

 

“소중한 사람을 두시면 안 될까요? 꼭.. 돌아가야 할 사람이 있으시면 안 되나요…?”

 

다시 톡,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물방울이 순식간에 떨어져 형체를 잃었다. 퍼져선, 이내 스미고, 사라진 듯 보인다. 지금 최한의 얼굴에서 아까의 짙은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확신을 내비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건, 그러니까.

 

“좋아해요, 케일 님.”

연모하는 이를 잃기 직전의 표정이다.

 

“케일 님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근데, 케일 님은, 꼭,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아요. 제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질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사람이 저보다 빨리 사라질 것임을 확신하는 이가 아닌 이상 지을 수 없을 표정이다.

 

“케일 님, 케일 님, 어차피 저는, 케일 님 보다 훨씬 오래 살아야 해요. 제가 원하지 않아도.”

울음 때문일까, 부끄러움 때문일까.

 

“저는 이미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일까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왔고, 그 동안 지키지 못했어요. 저 자신을 겨우 지키니까, 마을 사람들도 못 지키고… 그러다가, 지키는 사람이 되었는데, 처음으로.”

 

케일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내가 지금 어디가 돌았나. 그렇게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 것도 아닌데. 아픈가. 몸에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고대의 힘을 과도하게 쓴 것도 아닌데. 죽기 직전에는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고는 하지만, 지금 이게 죽을 일은 아닌데.

 

“처음으로 모시는 분이 생기고,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심장의 활력도 정상적인 것 같고, 어디서 피를 뿜는 것도 아니고, 귀가 아프다거나, 시끄러워서 머리가 울리는 것도 아니고.

 

“저는, 저는,”

어디 속이 다쳤나? 아니, 그러면 피를 토했겠지. 머리가 순간 핑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다. 피가 머리로 몰리는 기분이다. 이상하다.

 

“케일 님을 잃은,”

아, 왜 그러는지 알겠다.

 

“제가 당신을 지키지 못 해서,”

이건, 그러니까,

 

“죽지도 못 하고,”

사랑이다.

 

“당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속에서,”

케일 헤니투스는 최한을 사랑한다.

 

“억지로 살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게 전부다.

 

갑자기 자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와도 불안감이나 두려움보다 당황한 것이 크다. 그만큼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걸 믿는다. 이상한 논리로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가두려 여기로 데려왔다고 말해도, 조금 황당한 것 외에 화가 나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를 용인하게 된다. 그럴 수 있지 라며 넘기고 있다. 그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임을 케일은 잘 알고 있다.

 

“케일 님,”

 

자신이 지키라고 했으면서 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이로 만드냐는 질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네가 필요하지 않아서 따위의 말을 한다면 해결됐을 수도 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지키길 바랐다고 둘러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거짓을 세밀하게 진실로 위장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제가 당신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무모하게 행동하지 말아주세요.”

 

자신답지 않게 울음에 동요한다. 왜 우냐는 그 흔한 한 마디조차 두려워 말하지 못한다. 그 말이 네게 자그마한 생채기라도 낼까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 울음을 달래주지도 못했다. 그 원인이 저라는 것을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다.

 

“제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저를 향하는, 바라보는 눈이 비춰내는, 그 애정에 숨이 막혀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질식해도 좋을 애정이 넘쳐흘러서 착각이 이를 정제했다. 제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 조금씩 받아낼 수 있게. 자신이 처음 받아보는 온전히 저를 향한 애정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각각의 말을 받아들여 잘게 나눠 제가 삼킬 수 있도록.

 

“당신의 옆을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얼굴에 피가 몰리고,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은 감각. 열이 올라서 머리끝까지 붉어졌다고 해도 믿을 감각.

 

“가지 말아주세요, 케일 님.”

 

사랑이다.

 

“최한,”

그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리 와 봐.”

손을 내밀고, 저 쪽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여전히 어리고 순한 인상의 최한이 제게 울상으로 다가온다. 울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최한이 천천히 다가온다. 결국 보다 못한 케일이 조금 더 몸을 일으켜 가까이 했다. 우물쭈물하며 제게 다가와 조금 움츠리고 섰다. 버리지 말라고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 같은 표정이다. 그대로, 팔을 올려서,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케일.. 님?”

 

놀란 눈, 놀란 표정, 붉어진 얼굴. 케일은 그대로 토닥이려다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 그만뒀다.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으려다가 이 또한 그만뒀다. 최한이 높이라도 맞춰주려는 듯 몸을 낮췄다. 끌어안기 좋은 높이다. 따뜻해.

 

“내가 좋아?”

“네?”

“아까 말 했잖아. 다시 말해보라고.”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조금 기댔다. 목까지 빨개졌나? 착각인가? 몰라, 좋을 대로 되라지.

 

“... 네, 케일 님. 좋아해요.”

 

고개를 숙인다. 얼굴에서 열기라도 나올 것 같다. 이렇게 있으니까 귀엽네.

 

“그래서 날 지키려고 했어?”

“그, 처음부터는.. 아니었어요, 케일 님. 맨 처음부터 그래서 따라간 건 아니었어요..”

 

얘는 무슨 그랬다고 하면 내가 미워할 줄 아나.

 

“그런데?”

“그런데, 그.. 케일 님이, 점점, 눈부셔서..”

“그래서?”

작게 웃었다.

 

“…놀리지 말아주세요, 케일 님.”

“놀리는 것 같아?”

“……. 네.”

 

아, 들켰다. 결국 말해줘야 할까? 조금만 더 놀리면 안 되나?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니까 대신 조금 놀려먹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케일은 짧게 고민했다. 어쩔까, 어쩔까. 이렇게 된 거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이제 해야 될 일이 있지 않았던가. 이대로 있으면 백수 라이프의 명분도 생기고 좋지만, 케일은 이내 제가 거둔 이들을, 제 영역 안에 있는 이들을 떠올렸다. 뭐, 어쩔 수 없지. 여유롭게 이러고 있는 건 조금 뒤로 미뤄둘까.

 

“최한.”

“……. 네, 케일 님.”

“내가 돌아가야 할 사람이 있길 바라?”

 

조금 늦게.

“……. 네...”

 

“그게 누구였으면 좋겠는데?”

또 주춤.

 

“저는.. 저는, 상관없어요, 케일 님.”

“그래?”

“……. 네, 케일 님.”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

 

이제 진정이라도 좀 된 걸까. 아까와는 다르게 울먹임도 잦아들었고, 조금 더 조용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다. 제 옆에서 저를 부르며 제 말을 따를 때의 조금 높은 목소리가 아니다. 제가 부탁이라도 하나 했을 때, 혹은 저에게 감탄할 때의 저를 향한 밝은 목소리가 아니다. 때문에 케일은 죄책감이 들었다. 뭔가, 내가 몹쓸 짓 하는 것 같잖아. 괴롭히는 것 같잖아.

 

“최한.”

“… 네,”

작아졌고.

 

“최한,”

“……”

“최한.”

“… 네.”

느려지고, 웅얼거림만 남은 목소리.

 

“최한.”

“……”

“똑바로 대답해, 최한.”

“.. 네.”

“나를 봐.”

 

고개를 들었다. 안은 팔을 조금 풀었다. 물론 최한이라면 이런 건 종잇조각만큼 소용없겠지만, 어차피 그냥 해본 것 아닌가. 케일은 최한을 응시했다. 최한은 눈을 조금 돌렸다.

 

상처받기 싫다는 눈.

 

당신의 입에서 누가 나올지, 듣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는.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가 나오길 원하는.

 

사랑하고 있지만,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더는 놀림 받고 싶지 않다고.

제게 상처주지 말아줬으면 한다는 의미에 눈동자가 잠겼다.

 

케일은 그 눈을 가만 바라봤다. 저를 피하는 눈이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때까지 그대로, 올곧게 시선을 마주한다. 집요하게 시선이 최한을 쫓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케일 님.”

“어.”

“… 저한테 왜 그러세요.”

“뭘?”

“왜, 저한테, 저한테…”

 

다시 울 것 같은 얼굴.

 

“최한.”

“……”

“보라고 말했는데.”

 

시선이 조금 아래로 돌아가고.

 

“싫어? 내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면서?”

 

또 아래로.

 

“후회하지 말고, 지금 보라고 할 때 잘 봐, 최한.”

 

아래로, 멈추고, 이번에는 조금 위로.

 

“최한.”

 

주춤하는 시선이 결국 자신을 향할 때.

 

“…… 좋아한다, 최한.”

“네?”

“다시 말해줘?”

“네?”

“싫으면 말고.”

“아, 아뇨, 케일 님!”

화들짝.

 

“다시.. 말씀해주세요, 케일 님.”

“좋아해.”

“... 다시, 다시 말씀해주세요.”

“.. 좋아해.”

“... 다시, 말씀해주세요..”

아, 얼굴에 열 올라.

 

“…좋아한다고, 최한,”

멍한 얼굴.

 

“꿈 아니고.”

뺨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 말 한 마디에 다시 내리고.

 

“착각도 아니고.”

깜빡.

 

“아무런 문제도 없는 현실이니까.”

붉어진다.

 

“나를 봐, 최한.”

터질 것 같이 그대로 붉어진다. 왜 제가 읽던 소설에서 그런 표현이 알 수 있을 법 하게, 붉어진다.

 

침묵.

 

영원 같은 침묵이 잠시 지나갔다. 둘 다 그대로 할 말을 찾지 못해 굳어있었던 탓이다. 맨 처음에 케일은 부끄럽지도 않다는 듯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내 점점 열이 올라서 얼굴이 그대로 빨개졌다. 최한은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고장 나 있었다. 둘 다 얼굴이 지나치게 붉었다. 귀랑 목까지 빨개졌으니 더 말해야 할까. 그리고 침묵을 깬 것은 최한이었다.

 

“케일 님.”

“……. 어.”

“얼굴 빨개요.”

“너도 그래.”

“케일 님.”

“.. 왜.”

“노을.. 노을 같아요, 케일 님.”

“그게 무슨..”

“예뻐요, 케일 님. 잘 어울려요.”

그리고 미소.

 

“…허.”

예쁘다는 말, 네가 할 쪽이 아닌 것 같은데.

 

케일은 말을 삼켰다.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지금은 우선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 했다. 이 상황을 정리하고 제 실종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알려졌다간 아무리 최한과 친분이 있다 해도 누군가가 제 귀여운 연인에게 해코지라도 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최한.”

그런데 그 전에 해야 할 말은 하고.

“네, 케일 님.”

“소중한 사람, 돌아가야 할 사람. 그거, 네가 아니어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네..”

“어쩌지.”

의문. 기울어지는 고개.

 

“그거, 이미 너인데.”

최한은 얼굴이 더 빨개질 것도 없었지만, 잠시 놀란 것처럼 몸이 들썩였다.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해하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만, 우선은 해야 할 말도 했으니 집에 가야지.

 

“최한.”

“네?! 네, 케일 님..”

“그러니까, 가자, 집.”

“네? 네..”

축 처진다. 없는 강아지 귀가 생겨서 축 처지는 게 보이는 것 같다. 아, 설마.

 

“……. 가자고 일부러 한 소리 아니니까 괜한 생각 하지 말고. 내가 여기 계속 있다가 걸리면,”

“걸리면요?”

“……. 날 데려온 네가 미움 받잖아.”

 

아.

최한은 뭔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마치 ‘귀엽네. 라는 생각이라도 하는 것 같은 웃음이다. 하지만 케일은 잠시 이를 무시했다. 뭐, 뭐 어떡해. 아니면 쟤 오해할 텐데. 최한은 웃었다.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요, 케일 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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