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직. 치직.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영상구의 화면이 끊임없이 흔들린다. 제 수용량보다 거대한 마나의 흐름에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게 화면이 깜빡거린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폐허. 박살나고 무너져 남은 것이라곤 부서진 바위들밖에 없는 황폐하고 외로운 곳. 사람 위 시체가 산처럼 겹겹이 쌓이고 핏물이 흙에 스며들어 붉은 것도 검은 것도 아닌 땅이 끈적하게 뭉쳐지고 있는 곳이다. 부러진 검과 허무하게 나뒹구는 화살들이 이 곳의 현실을 알려주었다. 그곳은 전장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을 끊임없이 죽이고, 개인적인 원한이 없더라도 살아 숨쉬는 자들의 생명을 거두어가는 곳이다. 내 뒤의 사람이 쓰러져나가고 옆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잘려나간 팔을 움켜쥐어도 눈길 하나 돌릴 수 없는 전장이다. 마침내 모든 생명이 꺼진 듯 벌레새끼 한 마리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화면에 녹음된 소리조차 구슬프게 우는 듯한 바람소리가 전부였다.
"하하."
시체들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검을 놓지 않아 그대로 굳어버린 팔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대지를 적신 피보다 더욱 붉고 선명한 머리카락이 황량한 바람소리가 들릴 때마다 거칠게 흔들렸다. 피가 묻은 검은 사령관의 옷을 입고 자조적으로 웃어보이는 그 적색의 사내는 아무렇게나 제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서 끝이 보이지 않는 이제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몸뚱이들과 죽음, 절망을 바라본다. 지직거리는 화면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잡아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고, 화가 난 것 같기도하고, 죄책감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령관, 케일 헤니투스는 홀로 서있었다.
"큰일이네."
케일 헤니투스는 땅바닥에 떨어진 어느 병사의 명패를 집어들었다. 은으로 가공된 둥그런 표식에는 로운의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져있었다. 그리고 수려했던 음각의 왕국문양과 대조적으로 뒷면엔 펜으로 구깃구깃 어설프게 그려둔 황금 거북이와 방패가 그려져있었다. 케일은 그 그림을 엄지손가락으로 두어 번 쓸어내렸다. 그리곤 품에 잘 넣어두었다.
"책임을 지지 못했군."
사신이 내린 들판을 보며 케일은 중얼였다. 콜록. 짧은 기침 소리와 함께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다는 듯 미약한 검붉은 피가 튀었다. 바람 소리가 귀가 아파오도록 시끄러웠다. 곧이어 지진이 나는 듯 땅 속 깊은 곳부터 끓어오르는 진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대지가 갈라지며 케일이 서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쩌억쩍 벌어져 아찔한 협곡이 생겨난다. 시체가 우두두 떨어진다. 금이 가기 시작한 지면은 너 나 할 것 없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울렁이는 용암이 그 속에서 올라와 넘친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양새가 당장이라도 터져 온 세상을 덮어버릴 것만 같다. 용암이 닿은 모든 것들이 녹아내렸다. 하늘이 흐려진다. 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끼인 먹구름이 폭우를 퍼붓기 시작한다. 번개가 내려쳤다. 서있기도 힘든 태풍이 닥쳤다. 영상구의 화면이 더욱 사라질 듯 흔들렸다. 그 모든 장면 속, 그래. 마치 세계의 멸망이 도래하는 그 순간의 장면 속 케일 헤니투스는 우뚝 서있었다.
"희생되는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케일 헤니투스는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들었다. 이미 다 터지고 손가락 사이가 찢어져 손바닥을 보이는 것마저 그 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케일은 절망적인 힘은 더 절망적인 힘으로 눌러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을 중얼였다. 그리고 그대로 잠시 멈춰있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망나니 때려치지 말걸 그랬나?"
말투가 지나치게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케일 헤니투스의 손에서 자연의 모든 속성이 터져나왔다. 수 천 개의 석창과 구름을 찢는 불벼락. 쏟아지는 물. 모든 것을 쓸어내릴 듯한 바람의 소용돌이. 케일의 손에서부터 흘러나온 그 고대의 힘들이 세계의 멸망을 향해 내리쳤다. 강한 힘의 충돌에 화면이 더 이상 상황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엉망으로 손상된다. 얼마나 내려쳤을까, 얼마나 부수었을까. 당장이라도 암흑으로 덮일 것 같았던 하늘의 구름이 걷혔다. 용암이 끄륵끄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시 땅 안으로 기어간다. 소용돌이에 태풍이 먹혔다. 깊게도 파인 협곡은 단단하고 우직한 바위가 들어섰다.
그리고 케일 헤니투스는 쓰러졌다. 본래의 살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릇이 산산이 조각나 더 이상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 흔들리는 인영은 이윽고 뒤로 넘어갔다.
"케일 님!!!!!!"
검은 머리의 사내가 뛰어들었다. 케일이 땅에 스러지기 전 제 품으로 받아내었다. 로운의 소드마스터, 최한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케일을 끌어안고서 그의 왼쪽 가슴에 귀를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물 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케일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그 어떤 숨도 없었다. 최한은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주인을 잃은 자의 울음소리가 온 허공을 채웠다. 단단하게 단련된 어깨도, 등도,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고 피딱지가 앉은 케일의 얼굴 위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케일 님. 케일 님. 제가, 잘못, 잘못했습니다. 늦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요. 제발 한 번만 눈을 떠주세요. 케일 님. 최한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여과 없이 들려왔다. 그러나 케일은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최한은 케일을 품 안 가득 안고서 울었다.
"아아아아아!!!!"
최한의 몸에서 검은색 오러가 폭발적으로 발산되었다. 주위의 것이 전부 녹아들었다. 표정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최한을 마지막으로, 영상구 역시 녹아내렸다.
치직…….
화면이 사라졌다.
::
영상구는 녹아내렸지만 그 내용물은 로운 왕실에 저장되도록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이상을 눈치채고 케일 헤니투스쪽 영상구를 확인했던 알베르는 그 날 집무실 책상을 갈아야만 했다. 자신의 아둔함에 참지 못하고 내려친 주먹이 튼튼한 장인의 책상을 두동강냈다. 알베르는 케일 헤니투스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의 울음소리가 울릴 때 차라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상이 끊긴 뒤 알베르는 갖가지 욕설을 뱉으며 쥐고 있던 만년필을 부쉈다. 그러나 알베르는 알베르 크로스만이기에 겨우 책상 하나, 펜 하나에 그칠 수 있었다. 우지끈 거리는 소리에 놀라 들어온 시종에게 알베르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명령했다.
케일 헤니투스 사령관이 전사했을지도 몰라. 확인하고 오게.
그 날 밤, 알베르는 영상에서 봤던 그 전장이 사실임을 보고받았다. 헤니투스가에 보낸 사람들로부터도 케일의 죽음을 확인했다. 최한이 수습해온 케일의 시신을 오늘 새벽에 관에 넣었다고. 이미 차갑게 식어 도자기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은 케일의 몸을 안고 돌아온 최한은 그야말로 칠흑같은 암흑이었다고. 알베르는 입을 다물었다.
빌어먹을 자식. 죽으면서 유언 하나 남기지 않은 네놈 잘못이다.
알베르는 케일 헤니투스의 국장을 치뤘다. 세간에 이름 남기기를 원하지 않던 너이지만, 이것은 벌이다. 세상을 구하고 다른 이들의 세상이었던 너를 내다버린 벌이다. 알베르는 그토록 새하얀 국화꽃을 많이 본 적이 없었다. 귀족 뿐만 아니라 온 사방에서 몰려든 백성들이 울며 왕실의 담장 너머에서 꽃을 던졌다. 기사들이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구슬프게 우는 그 많은 자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새하얀 국화꽃이 그 넓은 왕실의 담장에 빈 곳 하나 없이 쌓여갔다. 시간이 있으면 구걸을 하고 돈이 있으면 빵 하나 사먹는 것이 당연한 빈민가 사람들마저 그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서 어디선가 하얀 들꽃을, 하얀 들꽃이 없다면 붉은 들꽃을 꺾어와 던졌다. 그것조차 구하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옷을 던지기도 했다. 때가 더럽게 묻었지만 그 옷 또한 언젠가는 하얗던 것이기에.
성대한 국장이 끝나고 나서 헤니투스가는 이례적인 무덤을 지었다. 모두의 의견에 따라 헤니투스의 묘지가 아닌 헤니투스 영지 내에서도 가장 사람이 많이 오갈 수 있는 곳에 그의 시신을 안치했다. 그를 기리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어렵지 않게 올 수 있도록, 케일 헤니투스를 기릴 수 있도록. 관 위로 흙이 덮이고 그 위에 대리석이 깔렸다. 돌로 정돈된 길 위 정중앙에 놓인 새하얀 대리석과 묘표는 그 누가 보더라도 특별한 것이었다. 묘표엔 케일 헤니투스의 이름과 태어난 날, 사망한 날. 은빛 방패를 기억하며. 따위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묘비엔 꽃이 끊이는 날이 없었다.
데르트 백작은 케일의 방을 그대로 놔두길 원했지만 바이올란이 고개를 저었다. 남아있는 자들은 케일의 흔적을 볼 때마다 괴로워할 것이다. 아파하고 외로워할 것이다. 헤니투스 영지 그 어디를 가도 남겨져 있는 것이 케일 헤니투스인데, 집에서마저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고싶지 않다. 바이올란의 주장에 데르트 백작은 입을 다물었고 조심스레 제 아이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바센과 릴리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데르트 백작의 방에 찾아와 제 어미의 말이 옳다 말했다. 데르트 백작은 두 팔을 벌려 제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아이들은 울었다. 그 다음 날 헤니투스가의 하인들은 케일의 유품을 잘 보관한 뒤 방을 깨끗하게 치웠다.
론은 더 이상 모실 주인이 없었다. 그러나 그를 내쫓기엔 시종으로서도 부집사로서도 유능한 자였고, 또한 데르트 백작은 그렇게 심성이 악하지 못했다. 오랜 상의 끝에 론은 바센 헤니투스의 새로운 시종이 되었다. 최한은 이 곳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며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서 짱돌 저택으로 들어갔다. 온과 홍 역시 한스가 좋았으나 케일이 없는 헤니투스 저택에 머물고싶지 않았다. 결국 케일을 따르던 모든 생명체는 원래 헤니투스가의 사람이었던 론, 비크로스, 한스, 그리고 힐스만을 제외하곤 전부 짱돌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직 제 주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케일이 우리를 묶어두었으니 우리도 영원히 그에게 묶여있으리라 다짐한 자들의 집이었다.
론이 보기에 바센은 꽤 괜찮은 도련님이었다. 혈기 넘치는 나이에도 사고를 치는 법이 없었고, 제법 영특했으며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귀족다운 귀족이었다. 인정이 넘쳐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친절했지만 권위를 잃지 않았다. 론은 왜 케일이 바센에게 그렇게도 백작위를 넘기고 싶어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론은 더 이상 레몬에이드를 타지 않았다. 이 도련님은 신 것을 마셔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다. 한 입 홀짝이고 잔을 내려놓은 뒤 점잖게 '론. 앞으론 단 것으로 준비해 줄 수 있을까.' 하고 말했다. 그것이 론의 심장을 아프게 후벼팠다. 이 도련님은 입 다물고 눈치를 보던 개새끼가 아니다. 내 개새끼는, 호랑이는 죽어버렸다. 바센을 대하는 론은 오랫동안 뒤집어썼던 온화한 시종의 가면을 다시 집었다. 아버지의 변화를 눈치챈 비크로스는 당분간 식단에 소고기 스테이크를 올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우리 공자님이 좋아하시던 거라서. 라온과 나누어 먹던 것이고 온과 홍이 10장씩 쌓아두고 먹으며 케일이 입에 묻은 소스를 매번 닦아주던 모두의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 중 아무도 이 곳에 남아있지 않으니 요리할 이유가 없었다. 비크로스는 감정 없이 웃으며 오래 먹지 않아 상해버린 소고기 덩이를 휴지통에 버렸다. 한스는 론과 비크로스에게 그 날 이후 말을 걸지 못했다. 분명 겉으로 보기엔 같은 행동과 말씨를 쓰는 사람인데도 위화감이 들었다. 살아있지 않은 인형같았다.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말하는 것이 소름이 돋았다. 생명감이 없어서, 한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들을 피했다. 복도의 끝에서 몸을 숨기고 한스는 온 얼굴을 두 손으로 마구 쓸어내렸다. 공자님, 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분노도 느껴지지 않고 슬픔도 느껴지지 않아서 죽은 사람 같습니다. 한스는 벽을 타고 주저 앉아 중얼거렸다. 힐스만은, 단장이 되었다. 단장직을 받았다.
짱돌 저택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한은 처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주인을 닮은 불길을 벽난로에 피우고 입을 열었다. 로잘린과 라크, 날개가 쳐져 주저앉은 막내를 둘러싸고 앉은 온과 홍. 어둠의 숲에 살던 가샨, 케이지와 당찬 메리. 그리고 금빛의 반 쪽자리 성자 잭과 하나까지. 최한은 그들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내가 발견했을 땐 이미 눈을 뜨지 않으셨다."
첫 운을 떼기 무섭게 "야아옹." 하고 슬픈 울음소리가 울렸다.
"냇가에서 내 옷을 찢어 물에 적셔서 닦아드렸다."
로잘린은 그제서야 왜 케일의 머리칼이 젖어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죽은 주인의 딱딱해진 피부를 벅벅 닦고 있었을 최한이 안쓰러워 고개를 돌렸다. 사후경직이 일어나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펴고, 혹시나 힘조절을 잘못해서 시신이 더 손상될까 무서워 덜덜 떨리는 손을 어떻게든 부여잡고서 케일의 피부를 닦아내렸을 것이다. 잠든 것처럼 편안하게 눈을 감은 표정이 슬퍼서 울었을 것이다. 피를 토하느라 다 터진 입술이 갈라져서 까끌했을 것이다. 손가락을 닦을 때 손가락 사이사이가 찢어져있어서, 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있어서 또 울었을 것이다. 그 곳에 있지 않았던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아무도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한 제 주인에게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을까. 그 누구도 아닌 절망과 외로움에 가장 익숙한 최한은 그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로잘린은 그게 안타까웠다.
최한은 케일의 등허리와 무릎 아래를 안아들고 걸었다. 마차를 부르기도, 말을 타기도 싫었다. 텔레포트를 사용하긴 더더욱 싫었다. 이 순간이 끝나면 더 이상 케일을 안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있었다. 태울테니까, 묻을테니까. 그게 죽은 이를 대하는 방법이고 장례라는 것이다. 최한은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딛을 때마다 울다가,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다가, 또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표정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달지 않았다. 최한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낼 때도 케일은 눈을 감고 있었고 가장 차가운 낯빛을 하고 있을 때도 케일은 그를 보지 못했다. 죽은 자란 본디 그런 법이다. 말이 없고, 알지 못하고, 위로해주지도 달래주지도 못한다. 최한은 태엽이 고장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다 멈추고 또다시 삐걱거렸다.
다시 저택의 상황으로 돌아와서, 최한은 그 말 이후 어떤 말을 할지 찾지 못했다. 헤니투스가에 도착한 뒤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이미 제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재앙 같은 하루였다.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다. 겨우 최한이 덧붙인 말이라고는 고작 이런 것이었다.
"...여전히 짚더미처럼 가벼우셨다."
라크는 묵묵히 눈물샘이 또 제 눈을 적셔오는 것을 느꼈다. 안 울고싶은데, 매번 이렇게 울보에 바보 같은 어린애로 남고싶지 않은데. 더 이상 어린애는 밥이나 잘 먹고 쑥쑥 자라라고 해주지 않을텐데. 입술을 새하얗게 물고서 울지 않으려 애를 쓰는 라크의 어깨를 로잘린이 감쌌다. 흐윽. 흑. 흐느끼는 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야아옹. 야아아옹.. 고양이 두 마리의 울음소리도 섞여들었다. 최한은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가장 어린 존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라온 미르. 위대한 용은 입을 열었다.
"나는 위대하지 못했다."
"……."
"세상을 지킨 약한 인간은 위대했다."
"라온."
"나는 라온 미르다. 약한 인간이 내게 이름을 주고 갔다."
"……."
"위대한 약한 인간이 주는 이름을 위대하지 못한 내가 받았다."
"라온."
"강한 인간아. 어떻게 하면 이 이름을 지킬 수 있나?"
내가 위대하지 못해서 인간이 마지막으로 준 이름까지 잃어버리면 나는 어떡하나.
최한은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어두웠던 그 날 밤과 새벽보다도 더욱 캄캄하고 칠흑 같던 절망은 그 날 완성되었다. 최한이 사람을 지키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람을 지킬 수 없게 되었기 떄문이다. 강한 인간이 더욱 강해진 것을 느꼈으나 라온 미르는 그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바라지 않은 강함임을 이해했다. 겨우 그깟 물리적인 힘과 케일 헤니투스를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다. 자신이라도 강성해지는 대가가 케일이라면 2차 성장도 3차 성장도 내버렸을 것이다. 덩치 같은거 안 커져도 된다. 오히려 우리 약한 인간 옆구리에서 언제나 몸 동그랗게 말고 잘 수 있으니까 더 좋다. 게다가 라온은 케일이라면 ‘그 따위 절망으로 자랄거면 자라지마.’ 라고 말해주었을 것을 알았다.
“강한 인간아.”
최한이 고개를 들어 허공에 날아오른 둥글고 까만 존재를 바라보았다.
“나는 복수할거다.”
복수. 최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약한 인간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를 만든 놈들을 다 죽일거다. 살고 있는 땅도 다 부술거다. 그 놈들이 마시는 물도, 공기도, 숲도 바다도 모두 내가 다 없애버릴거다. 두 무릎을 꿇고 울며 빌어도 나는 멈추지 않을거다.”
라온은 자신의 색을 닮은 인간과 눈을 마주했다. 검정색과 검정색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던 절망의 동굴을 닮아있었고 피와 고통이 난무하던 지하고문실을 지니고 있었다. 최한은 선한 입꼬리를 올려 비릿하게 웃었다.
“좋은 생각이야.”
사람을 지키는 법은 잊었어도 죽이는 법은 잊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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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글보글. 보골보골. 공기방울이 맑디 맑은 물에서 아름답게 올라왔다. 수면으로 올라갈 때 즘 귀여운 소리를 내며 퐁퐁 터졌지만 터진 만큼 또 새로 보그르륵 말랑한 방울이 생겨났다.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 액체는 세계수의 수액이었다.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원통형 통에 가득찬 수액은 말 그대로 생명력과 마력을 한가득 품고 있어 단 한 방울만 땅에 새어나와도 그 자리에 새싹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그 속에서 가만히 잠들어 있던 자는 이국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에 서늘한 인상은 이 곳 사람들보다 훨씬 차분한 기색이 감돌았다. 평소 단련을 해두었는지 팔이며 다리며 복부까지 빡빡하게 자리 잡은 견고한 잔근육들이 물살이 흔들릴 때마다 펄럭이는 옷 사이사이로 언뜻 보였다. 입고 있는 옷 또한 독특했다. 귀족이라기엔 장식 하나 없이 수수한 차림이었으나 또 그 재질이나 깔끔함의 정도가 일반 백성이 입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단순화시킨 귀족의 외출복이라 한다면 믿으리라. 짙은 고동색의 가죽 구두는 고급스러웠고, 사내를 닮은 새까만 바지와 자켓은 아무런 화려한 장식도 없었지만 그 촉감이 부드러웠다. 셔츠도 흰색이었건만 흙이 묻지도 않았고 아무런 얼룩이 없었다. 무엇보다 크라바트를 닮은 기다랗고 유일하게 색이 들어간 목장식이 귀족을 떠올리게 했다. 수액통 근처를 기웃거리던 엘프들이 재잘재잘 수다를 떤다. ‘인간 귀족복장의 약식이 아닐까?’ ‘그런가봐.’ ‘쓸데없이 보석이 주렁주렁 달리지 않아서 좋아보여.’ ‘맞아. 인간들은 커다랗고 예쁜 자기 돌에 넝쿨이 걸린다고 함부로 잘라버리니까.’
- …조용히 좀 해. 사람 자잖아..
수액통 속 사내가 눈가를 찌푸렸다. 종달새 같은 엘프의 목소리도 사내의 귀에는 시끄러운 알람소리와 다를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일어나라.
- 몇 신데 벌써 일어나래..
일어나.
- 피곤한데. …피곤해. 조금만 더 자자. 좀.
김록수. 더 이상 기다려주기엔 내가 힘들어.
- 제기랄. 일어나면 될 것 아니, …뭐?
번쩍.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빛나는 햇빛에 다시 눈가를 찡그렸다. 눈을 몇 번 끔뻑끔뻑 느리게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면서 빛에 익숙해지려 애를 썼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던 코와 입 안으로 수액이 밀려들어와 콜록 기침을 뱉었으나 편하게 호흡할 수 있음을 곧 깨달았다. 사내는 투명한 수액통 너머로 ‘일어났나봐!’ ‘와, 눈동자도 새까맣네!’ 하고 다닥다닥 모여드는 엘프들과 눈이 마주쳤다. 구경거리가 된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이어 눈동자를 굴리자 온 사방에 투명한 것도 아니고 무지개색을 띠는 것도 아니고,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액체가 제 몸을 감싸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물처럼 흘러내리는 것 같다가도 말캉한 젤리처럼 몽글거리는 감촉도 있었다. 묵직한 팔을 들어 손등을 살펴보니 온실에서 잘 큰 케일 헤니투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오래된 잔흉터들이 가득했다. 그러고보니 ‘검 하나 휘두를 힘도 없는 네게’ 라며 데르트 백작이 화낸 적 있던가. 가늘고 하얀 손가락 대신 그 손등에 달려있는 것은 마디가 굵었고 손톱이 자라있었다.. 팔을 들어 제 머리칼을 만져보자 더 이상 길지 않았다. 짧고, 관리한지는 꽤 된 것 같은 비죽비죽한 머리카락 끝에 콕콕 찔렸다. …이거 아무리 봐도 김록수같은데? 검은 사내, 김록수의 입매가 비틀렸다.
돌겠네. 나 죽은거 아니었나?
김록수, 케일 헤니투스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멸망이 더 큰 무력으로 제압되던 것이었다. 장기가 모조리 다 터지고 뼈가 산산조각으로 부수어지는 고통에도 그 모습 하나를 보려 심장의 활력에게 좀 더 버텨달라고 부탁했다. 짱돌이 기어코 희생하느냐며 안타까워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아파서 죽을 것 같았던 고통이, …실제로 죽은 건 맞았지만 어쨌든 종이에 손 베이는 것도 싫어하는 자신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그렇게나 버텼다. 이를 악물다가 이에 금이 갈 정도였다. 사실 느껴지지도 않더라. 다른 곳이 더 아파서. 그냥 입 안에 딱딱한 부스러기가 혀 위에 씹히기에 이빨이 부서졌나보다, 했을 뿐이다. 라온이 들었으면 대륙을 박살낼 기억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기하면서 김록수는 중력이 덜한 물 속을 괜히 발로 찼다. 말캉이는 무지개색 젤 리가 김록수의 정강이를 타고 사르륵 흐른다. 그렇게 온 내장이 찢어지고, 그릇이란 그릇은 다 깨져서 죽었다. 몸이 뒤로 넘어가 땅에 닿이기도 전에 숨이 멎어 의식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최한의 목소리 비슷한게 들렸던 것 같긴한데 너무 희미해서 확실하지도 않다. 오히려 최한보단 고대의 힘들이 훌쩍이며 ‘미안해.’ ‘아프지 않았으면 했는데.’ ‘고생했다. 쉬어라.’ 하며 남겨준 한 마디들이 더 선명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아쉬움은 남을망정 결코 후회는 없었다. 김록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죽을 듯이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목숨을 내놓을만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은 꽤 있었나. 가족들도……. 가족들은…….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들은 있었다.
지금에서야 느꼈다. 김록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똑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후회는 없었지만 아쉬움은 남았던 이유였을까. 갑자기 봇물 터지듯 떠오르는 제 울타리 속 존재들의 모습에 숨을 참았다. 라온도, 온도, 홍도. 자신이 거둔 최한도, 메리도. 가고싶은 길을 걸어갈만큼 강하지만 홀로 발을 움직일 수 없을만큼 어렸다. 제대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원하는 것을 얻고 편안하게 농담을 던지며 웃고 하루가 고되면 그 날은 맛있는 것을 먹고 단잠을 고이 자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부모는 아니지만 보호자로서의 책임감은 있었다. 내가 혼자 죽어버려서 버렸다고 느꼈을까? 빌어먹을. 내가 고아이언정 그걸 만들고싶진 않았는데. 상실감을 느끼게 한 죄책감이 컸다. 김록수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벌려진 입술을 따라 훨씬 더 많고 커다란 공기방울들이 끓는 냄비마냥 바그르륵 올라왔다. 어린 엘프들은 그것을 보고 꺄르륵 웃는다. 일단 저 엘프들부터 좀 치워줬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리며 김록수는 제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오던 익숙한 목소리에게 툭 생각을 내뱉는다.
- 제가 어떻게 살아있는지 말해주십시오. 세계수.
그것도 케일 헤니투스도 아닌 김록수의 몸까지 끌려와서 이 세계에 다시 던져진 것인지. 김록수가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투명했던 수액통이 까맣게 가려졌다. 정확히는 수액통에 닿은 수액이 그 면적만큼 색을 내어 더 이상 투명하지 않도록 가림막 역할을 했다. 이건 진짜 뭐하는 액체야. 어디선가 뽀그륵 하는 소리가 들려 위를 쳐다보자 수액을 뚝뚝 떨어뜨리던 아주 굵은 세계수 가지의 단면이 수면에 닿아있었다. 더 늦게 일어나면 힘들다는게 수액 더 내보내기 힘들다는 소리였군. 하기사, 나무의 수액이 사람의 피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이정도 흘려냈으니 제법 피곤할 것이다. 케일은 유독 세계수가 자신에게 무르다고 느꼈다.
그대가 세계를 구했으니 나도 그대를 구했다.
- 제 과거 안 보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가를 치뤘지.
- …자세히는 안 묻겠습니다. 살려줘서 고맙다고 해야합니까.
꽤 오래 잠들어있었어.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몸이라 이 곳의 환경에서 쉽게 바스라지기에 내 수액으로 혈관 하나하나까지 모두 다시 절여야만 했거든. 내가 자연의 재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괜찮을거다.
그래서 담겨져있던거군. 김록수는 이제야 이해가 갔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의 재로 돌아가기 전까지, 라는 말이 클리셰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내가 죽을 때 까지는 멀쩡할거란 소리다. 이미 37살을 살았고, 앞으로 장수하여 80세에 죽는다고 해도 겨우 50년도 안 되는 시간을 세계수가 버티지 못할 리 없었다. 최한처럼 수명이 드래곤만큼 늘어나면 몰라. 아니, 드래곤만큼 늘어났다 하더라도 세계수가 드래곤보다 얼마나 더 오래됐는데. 김록수는 평안하게 팔짱을 끼고서 물에 둥둥 부유했다. 물에 잠겨있다보니 점점 둥실거리는게 제법 재미있다.
- 제가 신경써야 할 점은 있습니까?
케일 헤니투스가 이 세계를 바꾼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나비효과라 하였던가, 작은 나비의 날갯짓에도 폭풍이 몰아치는 법인데 날갯짓 수준이 아니라 시작이 폭풍이었다. 그러니 그 파장은 말로 이루어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본인이 벌인 짓을 누구보다도 빠삭하게 알고있는 김록수는 계속 말해보라는 모양새로 팔짱을 끼고서 세계수의 말을 기다렸다.
그 케일 헤니투스가 사라졌으니,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 뭐요?
순식간에 예의라곤 팔아먹은 말투가 튀어나왔다.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말인즉슨 영웅의 탄생으로, 그 썩어빠진 세계로 돌아간다는 소리가 아닌가? 원래는 힐러 펜드릭도 사망했어야했고, 라온은 광룡이 됐어야했고, 최한은 절망을 완성시켜서 끝없는 고난을 겪으며 강해져야만 한다. 메리 같은 존재는 책에서 언급도 된 적이 없었다. 그런 것까지 모두 바꿔먹겠다는 소린가. 김록수는 눈썹을 위아래로 꿈틀거리곤 마저 항의했다.
- 아니, 이제와서 되돌리기엔 너무 온 것 아닙니까.
돌아간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돌아가려한다는거지.
돌아가려한다. 흐름이라는 소리군. 김록수는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케일일 때에 비해서 입매를 내렸을 뿐인데도 훨씬 차가운 인상이 그려졌다. 세계수는 그런 김록수를 달래듯 물처럼 흐르던 수액을 말캉하게 굳혀선 김록수의 입가를 쭈욱 당겨 다시 웃게 만들었다.
좋은 소식도 있어. 네가 지녔던 고대의 힘들을 돌려주마.
- 허어. 그거 힘 다시 줄 테니 일하라는 말로 들리는데 맞습니까?
맞아.
이거 다시 일하라고 살려놓은거네. 김록수는 쯧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계수는 친절하게도 설명을 이었다. 고대의 힘은 네가 얻었던 그 순서대로 찾아올거다. 케일 헤니투스보단 김록수의 그릇이 나은 편이긴한데 그래도 한 번 또 깨서 붙이기는 해야겠다. 그 말에 김록수가 질색팔색하자 세계수는 제 수액을 작은 나무병에 뚝뚝 담아주고서 마시라고 했다. 저번만큼은 안 아프게 도와줄거야. 김록수는 불만스럽게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이전보다 짧은 길이가 손맛이 덜하다. 돈은? 몸만 덜렁 와서 집도 돈도 없이 어떡하라는거야. 김록수가 따져오자 세계수는 말없이 엘프들을 가리켰다. …이거 착취 아니냐.
수액통이 와장창 깨졌다.
웅성거리는 엘프들을 제치며 김록수는 후우, 한숨을 쉬고 머리카락을 한 번 더 뒤로 꽉 쓸어넘기고 수액을 짜냈다. 물기를 머금은 옷이 묵직해서 기분이 별로다. 김록수는 주위 엘프들을 둘러보다 한 명을 콕 집어 입을 열었다.
“옷. 돈. 쓸 만한거 전부 다.”
내놔. 세계수님이 너희한테 받으래.
김록수가 히죽 웃어보이자 멍청하게 그를 구경하던 엘프들과 그 정령들이 마구잡이로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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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끊어버리고 싶다…….
최한은 피부가 당길 정도로 말라붙은 핏자국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모두 타인의 혈액. 최한이 발에 밟히는 자갈을 발로 툭 차고 고개를 들어보자 그 곳엔 끔찍한 몰골로 죽어나간 사람들만 가득했다. 검에 베여 죽은 사람도 있었고, 맨손으로 뜯겨나가 죽은 사람도 있었다. 최한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아귀에서 저 생명들이 비명을 지르며 으스러졌다. 끔찍한 촉감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케일 헤니투스를 죽게끔 함정에 파고 넣은 사람과 그 사람을 따르던 병사들이었다. 병사들의 목숨이야 아깝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주인을 모시려면 그 정도 각오는 해뒀겠지. 오러를 쓰기도 아까운 놈들이다.
그래도 이것으로 이제 끝이다.
지난 이 주간 위대한 용과 두려운 소드마스터는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 으깨버렸다. 그 빌어먹을 존재들이 밟고 자랐던 땅을 파괴했고 물에 그들의 시체를 내다버렸다. 시뻘건 핏물과 흘러나오는 잔해들로 오염되었다. 최한은 검을 툭툭 털어 남은 피를 땅바닥에 털어내고 검집에 집어넣었다. 허공을 바라보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까만 용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아래로 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한 남자의 잘린 머리가 툭 떨어졌다. 또 빨간 머리의 병사다. 최한은 라온이 죽이는 자들이 유독 붉은 머리카락을 많이 지녔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자.”
라온의 말에 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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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비를 한 뒤 헤니투스 영지로 가보라는 세계수의 조언에 따라 김록수는 착실히 몸이 끊어지는 고통을 한 번 더 겪고 몸뚱이가 확실하게 이 세계에 적응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 길을 떠났다. 엘프들에게서 뜯어낸 돈은 풍족한 생활은 아니더라도 잠깐 정착할 곳을 찾을 때까지 여관에서 머물 정도는 되었다. 헤니투스 마을에 도착한 김록수는 엘프나 입을 법한 옷을 버려버리고 근처 옷집으로 가서 평범한 평민들의 옷을 구매했다. 자신이 원래 입고있었던 정장을 입어도 괜찮겠지만 괜히 눈에 띄일까 싶어 그냥 가방 한 구석에 쑤셔넣어두었다. 보통 사람들이 입는 면 재질의 헐렁한 상의와 하의. 가죽신. 김록수는 잠깐 케일 헤니투스일 적 고급진 비단옷이 그리웠으나 이내 적응하여 헤니투스 영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방패 신녀가 맛있다 했던 세 번째 빵집에서 버터를 듬뿍 넣어 바삭한 빵 위 라즈베리 시럽이 범벅된 것을 사서 우물거리며 눈동자를 굴린다. 동양의 이목구비가 흔한 것은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휙휙 자신을 향해 돌아왔지만 이미 그런 시선은 예전부터 많이 겪어왔다. 김록수는 쉽게 무시하고서 빵 하나를 순식간에 다 먹어치우곤 봉투에서 두 번째 빵을 꺼내 입에 쏙 넣었다. 아몬드와 호두가 골고루 박히고 속엔 단단한 생크림이 묵직하게 들어있었다. 음, 여기 빵 정말 맛있긴 하네. 김록수는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으며 영지 내 광장으로 발을 옮겼다. 생각보단 달라보이는게 없는데. 빵집 맞은 편에 다른 빵집. 수선집. 정육점. 꽃집.. 기억과 눈 앞의 거리를 대조해보던 김록수는 골목을 꺾자마자 두드러지게 바뀐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광장 한 중간에 묘비? 아 설마. 제발. 저거, 진짜로?
불안감은 배신하지 않았다. 김록수는 거리 한복판 많은 꽃들에 덮인 제 묘비, 케일 헤니투스의 묘비를 허탈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유언으로 이딴거 하지 말라고 남겨둘걸 그랬다. 자세히 보니 왕실의 문양도 찍혀있는게 국장까지 치른 모양이다. 알베르 크로스만 네 이놈을 용서하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며 김록수는 고개를 까딱였다. 하아. 이렇게 주목받으면 내가 고대의 힘을 쓰기가 힘들어지는데. 김록수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타인의 눈엔 웬 이국적인 사내가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고서 감히 전쟁 영웅 케일 헤니투스 사령관의 묘비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의 안색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을 때, 김록수의 목에 그보다 더 차가운 쇠가 닿았다.
“누구냐.”
익숙한 목소리가 김록수의 귀에 꽂혀들었다. 검날에 목이 뚫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고개를 살짝 틀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최한. 강아지처럼 웃던 인상은 어디가고 얼음처럼 냉정한 기운만 풍긴다.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 피냄새가 진동했다. 김록수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최한의 입이 한 번 더 열렸다.
“불쾌하군.”
최한의 중얼거림에 라온이 공감한다는 듯 눈빛을 가라앉혔다. 케일의 죽음에 관련된 자들을 몰살시키고 돌아온 최한과 라온은 곧바로 케일의 무덤을 찾았다. 서로 묻지 않아도 그냥 발이 그렇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주한 저 사내는 감히 케일과 닮아있었다. 케일보다 훨씬 나이도 많아보이고,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작자에게서 케일 헤니투스의 기운이 너무나도 강하게 느껴졌다. 감히 내 주인의 향기를 흘리고 다니는 작자. 최한과 라온의 눈엔 김록수가 그렇게 보였다. 너무나도 그리워하던 것이 본래 소유자가 아닌 전혀 다른 타인이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로 거부감이 들었다. 최한은 진심으로 이 곳이 광장이 아니었다면 저 사내의 살을 당장이라도 갈라 그 기운을 집어 꺼내고 싶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최한의 살벌한 살기를 마주한 적 없던 김록수는 ‘벌써 영웅의 탄생화 되고있잖아!’ 하며 빌어처먹을을 외쳤다. 제 목에 드리워진 검날과 최한을 번갈아 쳐다보던 김록수는 한숨을 쉬며 검을 손톡으로 톡톡 두드렸다. 김록수는 아주 간만에 최한에게 처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에 떨어지자마자 맞기 싫어서 밥값도 시키고, 그러다가 여기까지 온게 아닌가. 김록수는 최한의 맨주먹을 흘깃 보다가 긴장한 티를 잘 감추고서 뻔뻔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좀 내려. 초면에 목숨 위협받는 취미 없어.”
“…불쾌해.”
말투까지 케일과 똑닮았다. 최한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뭐가 불쾌해?”
“내 소중한 사람을 닮았어.”
거야 그게 나니까 그렇지. 것보다 사람 닮았다고 그 사람 목에 칼 겨누라고 가르친 적 없는데, 최한. 누구냐. 누가 그 선하고 착한 애를 이따위로 만들었나. 영웅의 탄생 작가, 또 너냐. 이 썩어빠진 세상이!
김록수는 부글거리는 속을 잠재우려 애썼다. 더 늦기 전에 멈춰야한다. 어떻게 하면 최한의 검에 베이지도 않고 최한의 영웅의 탄생화를 저지할 수 있는가. 김록수의 뇌는 아주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라온이 갑자기 새까만 벼락을 내려치기 직전에 생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콰강!
김록수가 꺼내든 은빛 방패와 위대한 용의 검은 벼락이 부딪혀 찢어질 듯한 굉음이 광장에 울렸다. 새까맣던 색과 달리 한 순간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섬광이 퍼졌다. 김록수는 눈을 감았다 뜨면서 시야를 되찾고자 했지만 빛에 의한 손상은 단시간에 복구되지 않았다. 다른 손으로 눈꺼풀을 누르며 김록수는 보이진 않아도 제 손 끝에 펼쳐진 방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라온이 내려친 것은 은빛 방패가 아니었다면 광장 하나정돈 흔적도 없이 사라질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미친.’
내가 데리고 있던 위대한 용은 이러지 않았어! 최한이고 라온이고! 김록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라온은 적어도 자신의 원수를 눈 앞에 두고도 케일의 작전에 맞추어 그 복수심을, 살기를 참아 억누를 정도의 이성이 있던 용이었고 아무 죄가 없는 일반인이 말려들게하는 아이는 더군다나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비슷하다는 이유로 처음 보는 김록수에게 벼락을, 그것도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이 다칠 법한 스케일로 내려쳤다. 이건 정말로 뭔가 문제가 있다는건데. 김록수는 방패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숨을 고르다 은빛 방패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아직 제대로는 아니지만 얼추 보이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은 라온의 표정이라든가, 얼어붙어선 숨 쉬는 것을 잊은 최한이라든가……. 그들의 시선 끝에 닿아있는 것이 은빛 방패라든가.
“…이게 무슨.”
얼떨떨한 목소리의 최한은 누가 봐도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록수는 그런 최한을 무시하고서 제멋대로 입을 열었다. 김록수의 목적은 두 가지다. 일 번. 처맞지 않을 것. 이 번, 제 울타리 속 존재들의 영웅의 탄생화를 막는 것. 이 두 녀석 외의 다른 존재들도 분명히 영향을 받았으리라. 얼른 이쪽부터 갈무리하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가보아야만한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렇기에 김록수는 뻔뻔하게 거짓은 아니지만 거짓 같은 사실을 담았다.
“네 소중한 사람이 이 무덤의 주인이라면, 닮았을 법도 하지.”
김록수는 최한의 검을 조심스레 아래로 내리게 하고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움찔. 자신이 한 걸음 다가갈 떄마다 최한은 검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김록수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방패는 내가 받았다.”
마치 타인인 것처럼 말했다. 자신이 케일이라고 밝히기엔 다시 굴레에끼어들 것 같아서. 김록수 역시 인간이니 언젠가 죽을테고, 자신이 죽은 뒤에 또 영웅의 탄생화가 진행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김록수는 최대한 케일 헤니투스를 배제하고자 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가르쳐줘야한다. 김록수는 은빛 방패의 성스러운 날개를 활짝 펼쳤다. 최한과 라온은 그 방패를 바라보며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렸다. 케일 님. 케일 님. 성스러운 은빛은 최한의 머릿속에 케일이 사령관복을 입고서 홀로 저 방패를 거대하게 펼쳐내던 모습을 그리게 했다. 내 그리운 사람. 나의 그리운…….
“케일 헤니투스는.”
김록수는 손가락으로 최한의 가슴팍을 쿡 찌른다. 최한은 고작 손가락 하나에 가슴이 관통당한 기분이 들어 입 안이 쌉싸름했다.
“너희가 행복하기를 바라.”
최한은 숨쉬는 것을 멈추었다.
“고대의 힘엔 의지가 섞여들어.”
그러니 나는 그와 대화할 수 있다.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너희의 케일 헤니투스를 잘 알 수밖에 없어. 내가 너희의 소중한 이와 닮아보이는건 아마 그런 이유때문이겠지. 김록수는 그렇게 말했다.
물론 다 헛소리고 개뻥이다. 김록수는 그저 자신이 케일 헤니투스였기 때문에 그에 관한 것, 그의 생각을 다 아는 것이지만 이렇게 말해두는 것이 앞으로의 일에 좀 더 편할 것 같았다. 김록수는 모를 정보라도 케일 헤니투스가 알고있다면 그가 말해주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면 그만이니.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막으러 가는 것에 핑계를 댈 수도 있고. 케일 헤니투스가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길 바란다는 식의 변명을 대면 만사 오케이다. 최한과 라온은 더 이어 말하지 않고 자신들을 응시하는 김록수를 마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케일 님이 네 안에 있다는 소리인가?”
“비슷하지. 살아있다곤 못하겠지만, 의지정도야.”
“약한 인간이 우리에게 뭐라 안 하나?.”
“피냄새같은거 풍기지 말고 밥이나 잘 먹으라는데.”
최한과 라온의 표정이 무너졌다.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저건 얼굴이라기보단 피부거죽을 뒤집어 쓴 것 같은. 그런. 감정을 모두 녹여내어 가마솥에 끓여낸 다음 휘적이며 주걱으로 섞어서 굳힌 뒤 뒤집어쓰면 비슷할 것 같다. 최한은 양손으로 제 두 눈을 가리고 목구멍을 좁혔다. 끄윽. 무언갈 참아 억누르는 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왜 너에게 그 힘이 갔는지 설명해.”
억눌린 목소리임에도 원망이 섞여있었다.
“왜, 로잘린이나 나나. 케일님의 동료가 아닌 생전 처음 보는 너에게 케일님의 의지가 갔는지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김록수는 피식 웃었다. 억울했나. 그럴만도 하지. 김록수는 손을 뻗어 최한의 덥수룩해진 머리카락을 듬성듬성 쓰다듬어주었다.
“케일 헤니투스가 죽으면서 일이 좀 더럽게 굴러가게 생겼거든.”
“…….”
“애들한테 그런 걸 어떻게 맡겨. 라고 투덜거리는군.”
“…케일 님…….”
최한은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양손으로 누르던 눈꺼풀이 시큰거리고 뜨거웠다. 김록수는 그런 최한을 보며 이제야 내가 알던 그 최한이네. 하며 안심했다. 적어도 검집으로 두들겨맡거나 검에 몸이 갈기갈기 찢길 일은 없어보였다. 그럼 이 정도로 해놓고 슬슬 가볼까, 하고 김록수가 등을 돌릴 때 뭉툭하고 짧은 두 손이 김록수의 손을 덥썩 잡았다.
“이름이 뭐냐, 칙칙한 인간아.”
약한 인간보단 낫나. 아닌가? 김록수는 눈썹을 위로 들어올렸다가 내리고선 잠시 고민했다. 김록수라고 하면 내가 한국에서 온걸 최한이 눈치챌텐데. 록수라고 할까. 그것도 좀 특이한가.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던 김록수는 짧게 대답했다.
“록.”
이 정도면 크게 이쪽의 이름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을거다. 자물쇠 같은 느낌도 들고. 김록수 스스로도 제 이름 중 가장 독특한 음절이라 위화감이 없었다. 입꼬리를 당겨 한 번 더 확정짓듯 힘을 주어서 말했다.
“록이라고 알아둬.”
됐지? 나 간다. 김록수가 라온의 손을 떼어내려하자 되려 다른 한 손이 최한에게 잡힌다. 얘네들이 왜 이래. 김록수가 당황한 눈치로 둘을 바라보자 최한이 입을 열었다.
“록 님. 당신에게 케일 님이 있다면 록 님을 따르겠습니다.”
“뭐?”
“강한 인간 말이 맞다! 나도 간다.”
“…아니, 케일은 너희가 너희 삶 살기를 바란다니까?”
“케일 님의 의지를 이어가는게 제 삶입니다. 록 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돌겠네?
김록수의 황당한 낯은 뒤로 하고, 이미 결심을 굳힌 최한과 라온이 김록수의 양쪽 손을 하나씩 붙잡고 아주 간만에 희미하게나마 웃었다. 너무 희미해서 곧 아스라이 사라질 것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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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록수와 라온, 최한이 함께 지낸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김록수의 표현을 빌려 ‘새까만 놈들’은 착실히 제 할 일을 했다. 펜드릭의 죽음을 막고, 강대해져가는 모고르 제국을 다시 자근자근 밟아주었다. 그래도 다행히 알베르 덕에 많이 망가지진 않았지만 비틀거리기는 하던 로운 왕국도 좀 잡아주고, 헤니투스가에 정 떨어뜨리기 직전인 론과 비크로스도 최한과 라온이 설득하여 어찌어찌 잘 붙여두었다. 모든게 순조로워보였다. 하나만 제외한다면.
“오늘도 고생했다. 다들 자.”
“네. 록 님도 안녕히 주무십시오.”
“…….”
김록수는 오늘도 아무 대꾸없이 휙 숲 속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라온의 뒷모습을 보며 제 머리를 헝클었다. 분명 처음 만날 때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요 몇 주간 라온이 이상하다. 입가에 뭘 묻히고 먹기에 닦아주려 냅킨을 잡아들자 눈에 띄게 경계하며 뒤로 펄쩍 날아올랐다. 광장을 지나가다 라온이 평소 즐겨먹던 닭꼬치 가게가 보여 사줄까? 하고 물어봤더니 또 한껏 자신을 노려보다 땅을 박차고 사라져버렸다. 기피와 적대가 느껴졌다. 김록수는 최근 전투에서도 라온이 유독 더 잔인했던 것을 떠올렸다. 영웅의 탄생화가 진행되고 있다고밖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어쩐지 다른 동료들의 케이스와 달리 라온은 김록수가 건드려올수록 더 그 정도가 심화되는 것 같아서, 김록수는 다른 방안을 찾아야했다. 김록수는 잠시 고민에 잠기다 최한을 불렀다.
“최한.”
“네, 록 님.”
“내가 너희를 처음 만났던 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나? 케일 헤니투스가 죽고 일이 더러워졌다고 했는데.”
“네. 기억합니다.”
“나는 라온이 그 빌어먹을 더러운 상황에 휘말린거라 생각한다.”
“…네?”
“자세히는 말해줄 수 없지만, 지금 라온은 제 의지가 아닐거라 생각해. 지금까지는 내버려뒀지만 점점 심해지는게 보여서 슬슬 뭔가 조치를 해야할 것 같은데.”
네가 생각하기엔 어때. 김록수는 그리 말하며 최한의 눈과 마주쳤다. 최한은 가만히 김록수의 말을 듣다 입가를 굳혔다. 최한은 어딘가 답답해보였다. 마치 김록수를 탓하는 것 같은.
“…하.”
“최한?”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록 님은…….”
“최한.”
당신이 개입할수록 사태는 악화될겁니다. 최한은 뒷말은 차마 말로 뱉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사람은 모른다. 최한은 허리를 숙여 과하게 예를 표하고 김록수에게 인사했다. 얼떨떨한 목소리로 ‘그래, 자라.’ 고 말한 김록수를 뒤로 한 채 최한은 어둠의 숲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차분하게 걸어가던 발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디딜수록 김록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웅성거리는 군중 속 말소리처럼 윙윙거렸다. 지난 몇 십년 간 머물렀던 동굴에서 비명을 질렀던 때처럼, 벌의 날갯짓 소리처럼 계속해서 울렸다. 김록수의 목소리가. 김록수의 숨소리가. 아, 최한은 뛰기 시작했다. 숲 속에 깊이 들어갈수록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들이 제 몸에 부딪혀 엉망으로 부러져갔다. 발에 채이는 돌이 바스라졌다. 뛰쳐나가며 디딘 땅은 움푹 파여들어갔다. 파괴적이었다. 최한은 한참을 뛰어가 결국 김록수가 있던 오두막집의 작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숲의 중심에 다다라서야 발을 멈추었다.
록 님은 아무것도 모르신다. 록 님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라온과 자신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그리고 그 보다 더 우리를 무너뜨리고 또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록 님은 모르신다.
최한은 근처 커다란 메마른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머리를 뒤로 젖히니 새까만 밤하늘에 별이 총총 박혀있다. 작은 희망 같은 그 조그만 빛에 최한은 눈을 감았다. 처음 김록수와 함께 하기 시작했을 때 최한은 기뻤다. 조금이라도 케일의 흔적을 찾은 것 같아서 기뻤고, 케일이 머물고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니 다시 사람을 지키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행복했다. 김록수가 칭찬을 해주는 날엔 다시 괴물이 아닌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사르륵 웃었다. 그러나 날이 지날수록 최한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김록수는 라온만 의아하게 여기는 듯 했지만 최한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김록수를 볼 때마다 케일 헤니투스가 떠올라 괴로웠다. 아무리 케일 헤니투스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여도 결국 타인이었다. 자신에게 세 번째 집을 내어주고, 동료를 모아주었고, 함께 사선을 넘던 그 케일 헤니투스가 아니었다. 죽은 자를 아무리 닮았다해도 죽은 자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닮은 행동을 하고 비슷한 사람이라도 케일 헤니투스가 아니기에 거부감이 들었다. 도리어 위화감이 들었고, 거북했고, 당장이라도 케일이 아닌 얼굴을 하고서 케일처럼 웃어보이는 그 미소를 손아귀로 잡아뜯고싶었다. 도망가고싶었다. 함께 있을 때 쓰라렸다..케일 헤니투스가 그리웠고 그 자는, 김록수는, 아. 빌어먹을. 최한은 자신의 감정을 마주했다.
최한은 김록수가 싫었다. 그리고 좋았다. 그리고 또 미웠다.
그리고 아마 자신보다도 라온은 더욱 그럴 것이다. 최한은 발에 치이는 돌멩이를 툭 찼다. 얕게 고여있던 물 속으로 돌이 가라앉았다. 이것은 애증에 가까운 감정이다. 케일을 닮아서 소중히 여기고 싶고, 케일을 닮았기에 원망스럽다. 최한은 라온이 점점 더 케일 헤니투스를 닮은 이들을 도륙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최근의 라온이 왜 그렇게 날이 서있었는지 누구보다 이해했다. 김록수를 죽일 수 없기에 라온은 죽일 수 있는 자를 더 죽였다. 가장 눈 앞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것도, 당장 가장 소중한 사람도 김록수기 때문에 라온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고조되어갔다. 대신할 수 없는 자를 대신해서 제 앞에 있는 저 사람이……. 록 님이……. 록을…….
“죽이고 싶다.”
최한은 뒤에서 들려온 말에 흠칫 놀라 목소리가 나온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어두운 숲을 동동 떠다니는 라온은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강한 인간아. 나는 칙칙한 인간을 죽이고 싶어.”
“라온.”
“너는 아닌가?”
“…….”
라온은 입가를 바르륵 구겨댔다. 라온의 이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눈에 띌 정도로 얇아지고 있었다. 김록수의 짐작대로 라온의 탓은 아니었다. 단순히 빌어먹을 영웅의 탄생 속 용은, 그 작은 검은 용은 라온 미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 눈을 하고서 슬픈 감정을 머금은 채 산을 뒤엎고 들판을 조각내던 광룡이었기 때문이다. 그 기반은 분노. 고통에 의한 분노와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이었다. 원작의 신체적인 고통과 속박이 정신적인 고통과 소중한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결박으로 바뀌었다. 라온은 케일 헤니투스의 상실감과 부재로 인해 차츰차츰 갉아먹히고 있었다.
‘위대하지 못한 나는 이 이름을 잃고 마는건가?’
최한은 케일이 죽은 직후 라온이 자신에게 두려워하며 말했던 것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라온은 이미 멈출 수 없는 궤도에 올라타있었다. 영웅의 탄생에서 묘사되었던 것처럼 라온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울고있었다. 적군 중 케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는 더 끔찍하게 살해했다.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의 목 위를 거칠게 뜯어냈다. 케일같이 미소 짓는 자들의 입을 찢었다.
김록수를 죽이는 상상은 얼마나 했던가. 김록수가 케일처럼 제 입가의 음식을 닦아줄 때 손목을 자르고 싶었고 김록수가 케일처럼 제 이름을 불러오면 그 혀를 뽑고싶었다. 그러나 김록수는 케일을 품고 있기에. 케일의 의지를 가진 자를 죽이는 것은 케일을 죽이는 것과 다름 없기에 라온은 그를 죽이지 못했다. 김록수가 케일처럼 행동할 때 위로받았다. 더욱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숨을 끊고 싶었다. 라온은 혼돈스러웠다. 어긋나고 있었다. 라온 미르는 칙칙한 인간을…. 아니, 록을…. 아니, 케일 헤니투스를.
“그냥 죽이고싶다. 지금이라도 그 목을 잘라서 그만두고싶다.”
“라온. 진정해.”
라온은 메마른 나무 그루터기에 털썩 그 동그란 엉덩이를 가져다가 앉고 날개를 늘어뜨렸다. 꼬리가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추욱 쳐져있었다. 그러나 느껴지는 용의 기운이 묵직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감각을 무릅쓰고 최한은 라온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위대한 용 라온 미르는 아공간을 열어 은화 십 몇 개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엎었다. 챠르륵. 은화가 밤이슬에 젖은 진흙에 나뒹굴었다. 케일 헤니투스가 아닌 김록수가 주었던 용돈이다. 라온은 오물로 더럽혀진 은화를 식어버린 시선으로 응시하다 고개를 들었다.
“강한 인간아. 왜 이 충동을 참아야만 하나?”
라온의 몸에서 냉기 어린 새까만 마나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라온의 눈동자에서 빛이 떨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빛이 바람 위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라온이 꼬리를 위아래로 툭툭 움직이자 별 것 아닌 움직임에도 앉아있던 바위에 쩌적 금이 가기 시작한다. 라온의 둥그런 얼굴이 더 할 수 없이 날카로워져간다.
“라온. 분노에 잡아먹히지 마. 케일 님이 주신 네 이름을,”
“이미 이 이름은 의미가 없다.”
“라온!”
“나를 부르지 마라!”
고통스럽다. 신체는 자유롭지만 그 어느 때보다 결박되고 속박되어 벗어날 수 없는 지옥에 빠진 것만 같다. 감옥의 주인은 케일 헤니투스였고 자물쇠를 잠근 것은 김록수였다. 라온은 발버둥쳤다. 나가게 해줘. 나가게 해줘! 다시 한 번 밤하늘을 보고싶어! 나는, 나는!!
“…전혀 즐겁지 않다.”
나는 즐거운 용이 될 수 없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던 표정을 하던 라온의 몸에서 검은 마나가 한 순간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라온의 눈은 질근 감겨져있었다. 최한은 본능적으로 검집에 손을 대고서 자세를 낮추었다. 망토가 마구 나부꼈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바람에 주위의 나무가 거칠게 앞뒤로 움직이고 땅이 울려댔다. 조용하던 숲 속에 큰 충격이 일었다. 밤을 지배하던 몬스터들이 황급히 도망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방은 조용해졌다. 검을 쥔 최한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기척만 꾸욱,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끅, 삼키는 소리가 흘렀고 작은 용이 입을 열었다.
“강한 인간아. 나는 록을 죽일거다.”
“라온 미르. 정신 차려!!”
“그를 죽여서 내 이름을 되찾을거다.”
위잉. 라온의 주변에 보이지 않았던 마나 폭탄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그리고 셋과 넷……. 점차 세기 힘들정도로 많은 마법 폭탄이 어둠의 숲 한가운데 두둥실 떠올랐다. 최한은 곧바로 검을 빼들고 라온에게 뛰어들었다. 카앙! 아직 마나가 주입되지 못한 마나폭탄이 최한의 검에 반으로 조각났다. 곧바로 최한은 몸을 뒤로 굴려 횡을 그었다. 부드러우면서 힘이 실린 검신에 두 개의 마나폭탄이 동시에 기능을 잃고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조각들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최한은 온 몸에서 검은 오러를 피워올렸다. 주인의 의지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스믈스믈 기어오르던 오러가 넓게 퍼져 구물구물 폭탄을 집어삼켰다. 폭탄이 형체를 잃고 녹아내렸다. 라온은 그 모든 장면을 의미 없이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리곤 제 앞 가까이 있던 폭탄에 마나를 실었다. 용의 마나를 품은 폭탄이 위태롭게 웅웅거리더니 이윽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 아우성쳤다. 최한은 제 앞에 동동 떠있던 것을 발로 으깨어 부수곤 라온의 이름을 외치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제 오러를 있는 힘껏 끌어올렸다. 거대한 오러를 터지기 직전의 폭탄에 뒤덮었다. 콰아앙! 소드마스터의 오러와 용의 마나가 맞부딪혀 기괴한 굉음을 만들어냈다. 그 반동에 최한의 몸이 뒤로 튕겨져나갔다. 귀가 떨어질 듯한 소음에도 최한은 멈추지 않고 눈을 굴렸다. 라온은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김록수가 머무는 방향을 향해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최한 역시 위를 향해 뛰었다. 공중에서 부딪힌 두 눈빛이 서로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최한의 엷고 검은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최한은 두 손으로 검을 세게 잡고 라온을 향해 휘둘렀다. 라온은 김록수가 머무는 오두막으로 폭탄을 날리려다 거칠게 파고들어온 최한의 검에 급하게 실드를 쳤다. 동시에 실드가 부서져 파편이 되었다. 라온은 두 겹, 세 겹으로 실드를 치면서 다시 오두막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두막을 향한 작은 손이 급하게 바들거렸다. 최한은 라온과 달리 공중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최한은 낙하하기 전 이를 악물고 단전 깊이서부터 제 힘을 단단히 뭉쳐 한 번에 발산시켰다. 와지끈. 후둑. 떨어지며 길게 내려친 검상이 용의 방어막을 부순다. 막아야만 한다. 방해해서, 막아야만 한다! 최한의 머릿속이 절벽으로 휘몰린 듯 한 점에 집중되었다.
“역시 너는 강하구나.”
라온의 마나가 폭탄이 아닌 최한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최한은 검에 오러를 두르고서 다시 땅을 짓밟고 날아올랐다. 낙하하고 다시 도약한느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길었다. 솟구쳐오르는 최한의 몸뚱이로 라온의 흉흉한 마나가 덮쳐들었다. 최한은 팔을 휘둘렀다. 오러로 뚫어낸 길을 따라 라온이 떠오른 곳까지 다다랐다. 검을 사선으로 그어내리자 용의 단단한 피부에 생채기가 나며 붉은 피가 맺혔다. 따끔거리는 정도의 고통. 하지만 그 통각은 라온으로 하여금 과거의 고문을 떠올리게 했다. 흐으. 라온의 입에서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층 더 사나워진 용의 기운이 칼날처럼 최한을 향해 쏟아져내렸다. 최한은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힘을 주고서 시린 칼들을 쳐냈다. 채앵. 챙! 빗겨져나간 날이 최한의 어깨와 옆구리를 파고들어 그 살덩이를 깊게 베고 지나간다. 쓰라린 통증과 순식간에 옷을 물들이는 핏물에도 최한은 주저하지 않고 제 눈 앞의 것을 막아냈다. 잠시라도 눈을 팔면 목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흐읍, 근육을 부풀린 뒤 허공을 찢을 듯 검을 찌르자 라온의 실드가 또 다시 바스러지고 그대로 작은 용의 날개가 뚫렸다. 끄으윽. 고통스러운 라온의 신음에 최한이 급히 검을 거두었으나 라온의 동공은 빛을 잃어가고있었다. 분노.. 절망.. 공포. 라온은 몸에 상처가 늘어갈수록 과거에 덮어씌워지고있었고, 최한은 누군가를 지키는 법을 잊었기에 라온을 상처입힐 수밖에 없었다. 둘의 합이 반복될수록 최한과 라온의 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소중한 동료인데, 가족인데. 슬퍼하는 눈동자임에도 공격을 멈출 수 없었다. 촤악! 나뭇잎에 또다시 피가 흩뿌려진다. 라온은 온몸에 욱신거리는 검상이 늘어갈수록 과거에 짓눌렸고, 최한의 모습이 그 빌어먹을 베니온 자식과 겹쳐보이다 기어코는 자신을 구해주었던 케일 헤니투스와 그 날 밤 잔잔했던 밤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번쩍이던 가위날과 부어지던 포션들. 그리고 케일 헤니투스. 케일 헤니투스. 나의 약한 인간. 내가 아끼는 우리 인간. 라온은 더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진흙에 파묻힌 김록수의 은화를 본 순간 심장이 그대로 멈추었다. 그 인간도 상냥하다. 착한 인간인데. 칙칙한 인간도 내 입가를 닦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아니, 아니다. 나는, 칙칙한 인간이 싫다! 나는 소중한 나의 인간을 흉내내는 놈을 반드시 죽인다. 방해한다면 최한조차 죽인다. 아니, 세상을 다 죽일거다. 참을 수 없다! 동공이 얇게 좁아진 라온이 입을 쩌억 벌렸다.
“라, 온 미르!!!”
최한은 이제껏 자신이 상대해오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는 마나의 사나움에 등골이 오싹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흉흉하고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저것은. 저건 브레스다. 용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브레스를, 그야말로 살상을 위한 기술을 라온은 최한을 향해 꺼내들었다. 미완성의 브레스라 하여도 위력은 인간이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다. 최한은 라온의 이름을 몇 번 더 애타게 부르다 그의 침묵된 눈동자를 마주하고서 애원하는 대신 다시 검을 쥐었다. 죽을지도 모른다. 겨울의 눈바람같은 라온 미르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브레스를 뿜어낼 수 있다면 라온은 감히 드디어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을 진심으로 공격하는게 미친게 아니라면 뭐란말인가. 최한은 라온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다잡았다. 내 팔이 끊어지고 다리가 가루가 되어도 라온이 김록수를 죽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만은 볼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겨우 몇 십분의 일밖에 살지 못한 아이를 미치게 놔둘 수는 없다. 고작해야 6살의 어린애다!
‘아무리 용이라한들 브레스를 사용하면 힘이 빠지겠지.’
한 번만 버티면 된다. 한 번만 버티면, 라온을 제압할 수 있다. 최한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발가락부터 머리까지 온 몸의 기운을 검날에 집중시켰다. 사르륵 안개처럼 옅었던 오러가 순식간에 살아움직이듯 울렁거리며 시꺼멓게 물들어갔다. 최한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오러를 억지로 짓누르고 뭉개 힘을 압축시켰다. 용처럼 순식간에 큰 힘을 끌어낼 수 없기에 상대적으로 끌어모아 한 번에 터뜨려야만한다. 이윽고 최한의 검이 어둠 자체가 되었다. 라온은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눈가를 얇게 좁히곤 가슴이 부풀 정도로 크게 호흡했다. 최한은 오른발을 뒤로 빼고 힘을 주었다. 날아가지 않도록, 버틸 수 있도록! 선한 눈동자에 각오가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숲 전체가 요동치며 멀리 도망간 몬스터마저 비명을 질렀다. 굉음이 울렸다. 검은 브레스와 검은 오러가 서로를 할퀴고 녹이며 씹어댔다. 남아있던 폭탄이 모조리 터졌다. 최한의 피부가 갈라져 셀 수 없이 많은 생채기가 생겼다. 찌익. 찍. 피부를 타고 붉은 핏방울이 휘날렸다. 라온 역시 발톱에 금이 가고, 날갯죽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부어올랐다. 그럼에도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최한은 검을 휘둘렀고, 라온은 브레스를 토해내고.
그리고 김록수는 그 사이에 몸을 던졌다.
콰아아앙!
순식간에 숲에 고요가 찾아왔다.
“…다들 멈춰.”
쿨럭. 누군가의 마른 기침소리가 울렸다. 모래가 휘날려 뿌옇게 시야가 흐렸다. 점차 가라앉아가는 모래안개에 라온과 최한의 시야가 점점 확보되어갔다. 라온은 제 앞에 커다랗게 드리워진 은빛 방패가 보였다. 금이 가고 귀퉁이가 깨져있었다. 삐걱이며 좀 더 안을 자세히 보자 입가에 검붉은 피를 토해내는 인간이 있었다. 최한은 자신을 가로막은 수백 개의 석창을 보았다. 빼곡하게 땅에서 솟아나온 석창은 그 자체로 방어막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검이 닿은 부분은 형편없이 깨져 되려 길을 내고 있는 모양새였다. 마네킹처럼 굳어버린 목을 움직여 검의 끝을 보자 한 사내의 등허리에 박혀있었다. 새하얀 셔츠가 젖어들고있었다. 허억. 최한은 머리가 새하얘지고 말았다.
김록수는 숲 깊은 곳에서 굉음이 울리자마자 바람의 힘으로 달려나왔다. 염려했던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온이 광룡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최한이 광룡잡이의 숙명을 거부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제기랄! 빌어먹을! 라온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계속 방치한 내 탓이다. 건드릴수록 되려 안 좋아지기에 내버려두었던 것을, 잘못 판단했다. 둘만 두는게 아니었다! 김록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한시라도 빨리 다리를 움직였다. 늦지 않아야한다. 숲의 바깥쪽으로 정신없이 도망치는 몬스터들을 걷어차고 그 위로 뛰어올라 몬스터의 머리를 발판삼아 도약하면서 제 새끼들에게 달려갔다. 숲의 중앙으로 갈수록 방패를 꺼내들지 않고는 버티기도 힘든 위압감이 서려서, 김록수는 욕을 뱉었다. 겨우 도착한 곳엔 최한과 라온이 이미 다칠대로 다쳐 서로를 죽이려들었다. 김록수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김록수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그 사이로 제 몸을 날렸다. 방패가 브레스와 맞부딪히며 속을 뒤집었고, 검붉은 피가 울컥 토해졌다. 아, 씁. 김록수가 미간을 찌푸리기 무섭게 석창을 내보냈던 후방에선 날카로운 검격이 자신의 허리를 찔렀다. 푸욱하고 살이 찢어지는 거북한 소리가 들렸다. 크으윽. 칼에 찔린 건 오랜만인데. 외상과 내상의 환장할만한 콜라보레이션이다. 김록수는 미간을 콱 찌푸리며 몸을 구부렸으나 다리를 굽히진 않았다. 차라리 제 몸에 검이 박혀있고 용의 브레스가 방패를 맞이하는 것이 낫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다 하지만 그 고래가 내 애들이다. 까짓거 좀 터져도 된다.
모래안개가 완전히 가라앉자 김록수 역시 라온을 볼 수 있었다. 넋이나가있었던 라온의 눈빛에 한 줄기의 빛이 들어왔다. 김록수는 그나마 완전히 광룡이 되지는 않았음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뒤를 보자 새하얗게 질린 최한이 덜덜 떨고 있다. 김록수는 한 번 더 피를 토해내곤 붉어진 땅을 발로 지익 그어 대충 흔적을 지웠다.
“최한.”
“네, 네.”
“검 좀 빼줘. 아프다.”
“버, 벌어질겁니다.”
“재생 능력 있어. 괜찮으니까 빼.”
오들오들 떠는게 불쌍할 지경이다. 김록수는 괜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떴고, 최한은 한참 머뭇거리더니 이내 순식간에 검을 다시 뽑아들었다. 차가운 쇠를 잘근잘근 물고있던 근육이 비틀리며 아우성쳤다. 김록수는 크윽, 신음을 흘리며 제 허리를 꽉 눌렀다. 심장의 활력아, 빨리 좀 돌아다오. 김록수는 차분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다행히 최한도 라온도 갑자기 들이닥친 자신의 존재에 더 이상 싸울 투지는 잃은 것 같았다. 김록수는 그제서야 천천히 다리를 굽히고 다 날아가 밑동만 남은 나무 그루터기에 등을 기대었다. 끄으윽. 최한의 검에 당한 등허리가 닿아 더 아프다. 오러가 몸 속에서 스파크라도 일으키는 것 같다. 김록수는 그냥 땅바닥에 엎어졌다. 설마 이놈들도 내가 이렇게 엎드려있는데 다시 싸우려들진 않겠지. 좀 쪽팔려도 안 아픈게 낫다. 김록수는 몸을 늘어뜨렸다. 최한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언제라도 라온이 다시 공격해온다면 맞설 수 있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방어적인 경계를 보였다. 라온은 최한에게선 시선을 떼고 땅에 엎어져 앓는 신음을 삼키는 김록수. 그의 모습을 냉정하게 보고있었다. 김록수에 대한 살의라든가 혼란이라기보단 마치 관찰하는 모양새였다.
“칙칙한 인간은 왜…….”
라온의 입이 열렸다.
“…많이 다쳤다. 지금.”
약한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결국 별거 없는 인간이다. 소드마스터와 용의 공격을 한 몸에 버틴 미친 짓을 벌리고도 목숨이 붙어있지만 그럼에도 부상은 입었다. 라온은 흙바닥에 퍼지는 김록수의 핏더미를 보며 웅얼였다.
“왜 희생하려하나.”
김록수는 몸을 데굴 굴려 옆으로 몸을 반만 뒤집었다. 라온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었다. 김록수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라온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라온은 움직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김록수는 한숨을 쉬고 한 번 더 라온에게 말했다.
“이리 와.”
라온의 꺾인 날개가 퍼덕였다. 라온은 김록수의 머리맡에 앉았다. 김록수는 라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고통으로 손끝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예전, 1차 성장을 마쳤던 그 날의 케일 헤니투스와 같아 라온의 입매가 비틀려 구겨졌다. 검은 머리통을 토닥거리던 김록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너희끼리 싸우는걸 내가 지켜볼까.”
“넌 우리랑 아무 관계 없다.”
“왜 없어. 내가 보호자야.”
보호자. 보호자……. 갈피를 못 잡고 눈의 방향을 옮겨다니던 라온이 무언갈 말하려다 마는지 계속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라온이 작고 상처입은 뭉툭한 손을 김록수의 이마에 얹었다.
“너는 케일 헤니투스가 아닌데.”
라온의 손에 김록수의 까만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왜 자꾸 그 사람처럼 행동하나.”
왜 나를 구했던 그 사람처럼 행동하나.
왜 자꾸만 나를 보호하려고 그러나…….
김록수는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던 팔을 움직여 라온을 가볍게 품에 끌어안았다. 라온이 순순히 끌려오지 않았기에 팔을 걸쳐둔 꼴이 됐지만, 김록수는 라온의 등을 도담도담 쓸어주었다. 김록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음. 그건. 그리고 최한에게도 눈길을 한 번 주고 석상 같은 최한도 흘깃 쳐다보았다. 김록수는 피식 웃어버렸다.
“마음 가는거엔 이유가 필요없더라고.”
라온은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김록수는 그저 라온의 등을 도닥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라온이 몸을 움직여 김록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김록수는 음, 하고 다시 팔을 둘러 라온을 품에 안아주었다. 흐윽. 라온의 팔이 김록수의 셔츠를 잡아끌었다. 단추가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지고 김록수의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김록수는 어린애를 안아주었다.
“나는 네가 싫다.”
“음.”
“약한 인간이랑 닮아서 밉다.”
“사랑할 줄 아는 용이라 그래.”
끄윽. 울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약한 인간이 보고싶다. 너무 너무 보고싶다.”
“떠나보내는 법도 배워야지.”
케일 헤니투스는 너 똑똑하대. 내가 봐도 그래. 김록수는 별일없는 말투로 가볍게 말하며 머리부터 늘어진 라온의 꼬리까지 쓰다듬었다. 상처입어 까끌까끌한 비늘의 감촉에 김록수의 손바닥이 긁혔지만 괜찮다. 김록수는 온기를 나눴다.
“네가.”
울음을 머금은 용이 말했다.
“네가…….”
끅. 이것을 말해도 되는지, 이게 정말 내 감정인지도 모르는 엉망인 목소리다. 자기 자신에게도 의문을 품은 떨림이었다. 김록수는 여느 때처럼 그런 아이들에게 ‘뱉어내.’ 하고 말했다. 라온은 그제서야 제 감정을 제대로 마주했다. 라온은 쿨쩍 눈물방울을 뚝뚝 훌려내며 모래성을 무너뜨리듯 뱉어냈다. 형편없이 어린아이가 울었다.
“네가 좋다…….”
약한 인간처럼 네가 좋다. 상냥하고, 다정하고. 위대하고.
한 번 터진 감정은 봇물처럼 쏟아져내렸다. 네가 좋았다. 케일 헤니투스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게 무서웠다. 내 약한 인간이 너무 그리웠다. 사실 너를 미워하지만. 너를 미워했지만 너를 좋아한다. 너도 소중한 사람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를 죽이려했다. 미안하다…….
“괜찮아.”
나를 죽이려하는건 몰랐는데. 좀 놀라긴 했지만 괜찮다. 김록수는 이들에게 케일 헤니투스가 어떤 존재였던지 이제야 깨달았다. 이들의 영웅의 탄생화가 진행된 전말도 파악했다. 자신과 케일 헤니투스 사이 혼란스러움이 광룡화를 증폭하고 있었음을 알아냈다. 정확히는 김록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반발심이 상황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음. …그럼 이제 괜찮을 것 같은데? 낭창하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회로를 돌리던 김록수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제 품에 있는 라온의 얼굴을 감싸올려 눈을 마주했다. 그리곤 웃어주었다.
“애들은 원래 사고 치면서 커.”
네가 나를 죽이려했던건 고작 그 정도의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쐐기를박아버렸다. 라온은 물기 어린 눈동자로 제 앞의 웃고 있는 인간을 응시하다가 결국 또 다시 와앙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김록수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눈물 방울을 흘려냈다. 으아아. 와아아앙…….
케일 헤니투스의 죽음 이래로 응어리를 다 풀어내듯이, 쌓여있던 묵직한 감정을 흘려보내듯이.
그 눈물에 묵혀두었던 독들을 담아 모조리 내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한은 검에서 손을 뗐다. 하하. 하..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의 최한은 입을 손으로 막고서 꾹 감정을 억눌렀다. 우리가 저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했던 까닭은 단순히 케일의 행동과 닮아서가 아니었나보다. 그것보다 먼저, 우리가 케일 헤니투스를 사랑했던 까닭은, 그가.
[불쌍한 놈들.]
[배는 안 고프고?]
[구해야지.]
절망에 빠지던 최한을, 정신이 나갈 정도로 괴로워하던 라온을 그 구렁텅이에서 꺼내준 것은 케일 헤니투스의 동정어린 마음. 배려하는 태도. 아껴주는 마음. 지독한 밤하늘에 반짝거리는 별빛같던…….
친절.
그가 친절했기 때문에…….
“하아.”
최한의 입술에서 목 매인 탄성이 터졌다. 서럽게도 우는 라온을 끌어안고 달래는 김록수가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 역시, 케일 헤니투스와 같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며 자상하고. 착하다. 닮아있던 것은 케일 헤니투스의 자잘한 행동이 아니라 그 근본이 닮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은 확신이라기보단 다짐에 가까웠다.
절망의 어둠을 헤쳐나갔던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검에서 지키는 검으로 변화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시 길을 바로 걸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저 사람을 붙잡고 발버둥치며 다시 한 번 빛을 향해서. 존재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무한한 삶을 사는 최한과 작은 용은 수없이 많은 생명의 죽음을 바라봐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타인의 친절에 기대어 사랑하던 친절한 이를 보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우리는 케일 헤니투스의 죽음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밤하늘의 별빛이 아름다웠다. 최한은 검을 집어넣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