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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게 뭡니까? 숨겨진 쌍둥이 동생?”

“자네는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나.”

“진담입니다. 아니면 저 모르는 사이 분신술이라도 익히셨습니까.”

 

분신, 뭐? 아니. 됐습니다. 케일 헤니투스는 이 상황에서까지 왕세자와 투닥거리고 싶지 않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복잡한 두 사람과는 달리 이 사단의 원흉은 감히 왕세자 본인의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턱을 괸 채 장내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 봤자 남들 눈에는 그게 그거인 얼굴이라 이상해 보이지도 않겠지만. 케일은 그와 엮이는 순간부터 무조건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에 조금이라도 멀어지고자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젠 아무리 괴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건 좀 규격 외 아닌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달래고자 연거푸 마른세수를 반복했지만 기민한 머리는 방금 전까지 들었던 단편적인 이야기만으로도 그의 정체를 유추했다. 전부 비틀리고 뒤엉켜 이제는 형체조차 찾을 수 없는 원작, 빌어먹을 영웅의 탄생 속 알베르. 본인의 세계에서 최한과 함께 로운왕국을 부강하게 만들고 있어야 할 작자가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 건지. 그보다 여기가 영웅의 탄생 속 아니었나. 제가 김록수였던 시절 웹 소설에서 수도 없이 읽었던 평행세계 이야기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어쩌면 제가 원작의 줄거리를 비튼 탓에 생긴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막상 제가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고나니 마냥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슬쩍 고개를 든 케일은 의도치 않게 짙고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했다. 엮이면 귀찮아질 것 같은 낯짝. 그렇다고 마주친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쪽 저하도 뭐라고 말씀 좀 해보시죠.”

“내가 무슨 말을 얹겠나. 자네들이 대화하는 걸 구경하는 일만으로도 즐거우니 계속하게.”

“돌겠네. 친애하는 로운 왕국의 반짝이는 희망이자 유일한 태양이신 저하의 장래가 암담합니다.”

“케일 공자라고 했나. 방금 그 말 불경죄야.”

 

비슷한 말버릇에 유들거리는 말투. 분명 제가 알던 알베르와 큰 차이가 없음에도 미묘하게 꺼림칙했다. 하기야 불행이 덕지덕지 묻은 원작에서 자라난 알베르라면 저런 꼴이 될 수밖에 없나. 케일은 익숙한 불경 어쩌고 하는 말을 무시하며 책상 위로 걸터앉았다. 갑자기 왕세자가 둘이 된 상황을 남에게 설명하는 것도 무리고, 나이 차인지 살아온 환경 탓인지는 몰라도 외관도 완벽하게 같진 않다. 무엇보다도 순순히 이쪽 말을 따라줄지가 불투명하니 대역이랍시고 내세우기도 그렇고. 통제를 위해서는 쿼터라고 해도 다크엘프를 제압할 정도의 무력을 가진 이가 지켜봐야 할 테니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곳을 찾아 헤니투스 영지에 연락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쩐지 통신구가 끊임없이 붉게 빛나더라니.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왕세자를 흘겨보자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제법 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체조차 짐작할 수 없는 도플갱어가 나타난 기분일 테니 아주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짧은 숙고 끝에 결론을 내린 케일이 허공에서 양발을 흔들거렸다. 정말, 귀찮다.

 

황금패 열 개는 준비해두셔야 할 겁니다. 심드렁한 말투로 소매에 묻은 온과 홍의 털을 툭툭 털어낸 케일이 주머니 속 금화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열 개는 너무 많지 않나. 진지한 얼굴로 당황하는 알베르가 우스운 탓에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으나 앞으로의 귀찮은 일들을 생각하면 썩 좋아지지는 않았다. 대충 시선으로 의중을 교환한 그가 대답은 건너뛴 채 말을 이었다. 종족 간의 화합을 위해 데려온 다크엘프라고 둘러대겠습니다. 용들은 못 속일 테니까 그 점은 생각해두십시오. 정말 다른 방도가 없다는 듯 뱉는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왕세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역시 믿을 사람은 자네뿐이네. 왕국의 보물, 위대한 방패공자……우리 1절만 합시다. 케일의 떨떠름한 얼굴을 보며 소소한 만족감을 느낀 알베르가 대단한 공적이라도 치하하듯 다정하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그나저나 공자. 저자는 정말 누군가.”

“궁금하십니까?”

“갑자기 있던 호기심까지 사라지는군. 그냥 말하지 말게.”

 

정말, 전혀 궁금하지 않아. 빛보다 빠른 태세전환의 왕세자를 흘겨보다 툭 밀어낸 케일이 익숙한 낯의 이방인과 다시금 시선을 마주했다. 악수라도 청할까. 아니면 정중하게 고개라도 숙여? 이런 상황까지 와서도 유려한 웃음을 고수하는 꼴이 역시나 거북했다. 아주 모르는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불편할 일인가.

 

“그런 이유로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저하.”

“이쪽의 ‘내’가 자네에게 쿼터라는 사실까지 밝혔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협조 좀 해주시죠.”

“하지만 나는 자네를 믿을 수 없어.”

“정 뭣하면 강제로 마법을 풀어버릴 겁니다.”

 

자네가 그 정도로 전능한 마법사인가. 아뇨. 그냥 용 한 마리를 기르고 있습니다. 흘끗 저만치의 본인을 곁눈질하는 모양새가 아무리 세계 하나를 넘어온 이방인이라도 믿기 힘든 대답이었나 보다. 같은 얼굴을 한 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까지 보고서야 어쩔 수 없다고 결론 내렸는지 황금처럼 반짝이던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순식간에 짙은 어둠에 잠겼다. 그 광경이 퍽 아름다웠으나, 케일에게 대단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또다시 시선이 얽혔다. 한 치의 미동도 없는 흑갈색 눈동자 속에 들어찬 진득한 호기심과 흥미. 어째서인지 단순히 제가 알던 알베르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거북함이 케일을 덮쳤다. 잠도 못 자고 나왔더니 예민해졌나. 먼저 눈길을 거두고 작별인사라도 남기려던 그가 툭 튀어나온 이방인의 말에 잠시 행동을 멈췄다.

 

“피하지 말게.”

 

나직한 언어는 그 잔재가 귓전에 머물기라도 하듯 기묘한 무게감을 남겼다. 그가 무슨 말을 더 내뱉기 전에 옷매무시를 고친 케일이 제 옆의 왕세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 갑니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게나. 어마어마한 짐 하나를 덜어냈다는 홀가분한 얼굴로 싱글거리는 저쪽은 괜찮은데, 왜 이쪽은. 흘끗 쳐다본 그가 무슨 말을 더 꺼내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기에 케일은 차라리 빠르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길 택했다. 가명은 알비가 좋겠다. 알베르와 알비. 그는 애써 피곤한 생각들을 지워내며 저만치서 자신을 기다리는 수행원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약한 인간, 왕세자가 둘이다. 재잘거리는 라온에게는 애플파이를 물려주는 것으로 입막음을 대신했다.

 

 

02

 

알베르 크로스만은 이 모든 상황을 반쯤 꿈처럼 여겼다. 잠에서 깨어나니 저와 똑같은 얼굴이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지 않나, 제 얼굴을 보자마자 급하게 통신구를 찾아 웬 붉은 머리카락의 귀족을 호출하더니 그쪽 영지로 끌고 가질 않나. 와중에 그 귀족은 수중에 용도 있고, 쿼터 다크엘프를 막을 무력까지 갖고 있단다. 최한이라도 휘하에 들였나 싶어 농조로 물으니 가벼운 턱짓으로 저만치의 수행원들을 가리키는데, 그사이 정말로 낯익은 소드마스터가 서 있어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알던 최한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으나 동일인이 분명했다. 이렇게나 다르니 여기는 일종의 평행세계라는 설명에도 순순히 납득할 수밖에. 제가 알던 상식이 제대로 통용되지 않는 세상에서도 케일 헤니투스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주인 찾은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는 최한 만큼은 퍽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그로부터 약 두 달이 흘렀다. 무의미한 저항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한 알베르 크로스만은 금세 상황에 적응했다.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전력을 가진 그에게 살심이 있었다면 저를 만나자마자 해치웠을 터. 어렸을 적부터 처세술 하나로 살아남았던 청년은 제 영역을 넓힐 방도를 모색하기보단 케일이 대충 얼버무린 알비라는 깜찍한 이름으로 자신을 둘러싼 새로운 환경에 녹아들길 택했다. 다크엘프가 스스럼없이 본인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시대라니. 목구멍으로 죽은 마나를 넘길 때나 자각하던 혈통에 대한 미미한 감동은 부수적으로 뒤따라왔다. 이런저런 상념을 흘려보내던 알베르의 뒤로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그는 구태여 돌아보지 않았다. 느긋하고 가벼운 발걸음. 구국의 영웅, 은빛 방패의 소유자, 동북부의 총사령관 따위의 화려한 수식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편한 복장의 청년이 성큼 방 안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얌전히 계시네요.”

“자네는 내가 왕세자란 자각이 있는 건가.”

“제가 모시는 분이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나를 아는 것처럼 굴잖나.”

 

그 말이 퍽 정곡이었는지, 대화를 이어가던 케일의 입이 잠시 다물렸다. 하, 이거 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말의 내용과는 달리 영 곤란하지도 않은 얼굴이라 알베르 또한 제대로 된 속내를 캐낼 생각을 거뒀다.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 없는 데다 그런 표정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우니. 허물없는 친우처럼 손을 뻗어 뺨을 꾹 누르자 와 닿는 시선이 퍽 건조했다. 이렇다 할 반응은 없지만 아주 무시하지도 않는 걸 보면 그와 저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알려줄 생각은 없어 보이고.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귀찮은 머리싸움은 관두겠노라 다짐한 게 무색했다. 평생 살아온 방식을 버리는 게 어디 쉽나. 팔을 휘적거림으로써 알베르의 손을 치워낸 케일이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자 그는 순순히 제자리로 돌아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도 질색하는 표정과는 달리 피하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헤니투스 가문의 어디서 이런 배짱을 가진 공자가 튀어나온 건지. 턱을 괴고 창가 너머를 내려다보는 청년의 시선은 퍽 온화했다. 그 끝에 정원에서 뛰어노는 고양이 두 마리와 이를 지켜보는 최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어린 용 한 마리가 자리했다. 두 달간 지겹게 들었던 백수 타령과는 달리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사서 고생하는 모습이 퍽 모순적이다. 본인은 알까. 저를 보고 있지도 않았으면서 뚫어지게 관찰하는 시선은 잘도 알아챘는지, 먼저 입을 연 것은 그쪽이었다.

 

“최한과 각별한 사이 아닙니까.”

“그래 봤자 비즈니스지. 내가 아는 최한은 도통 누군가와 사적인 관계를 맺을 사람이 아니었거든.”

“일방적으로 이용하진 않으셨겠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뭐 어떤가. 자네가 이 세계의 알베르 크로스만과 나를 다르게 생각하듯 내 세계의 최한 또한 공자의 관할이 아닐 텐데.”

“그런 것치고는 꽤 자주 쳐다보시던데.”

 

내가, 최한을? 예. 그건 아마 공자를 지켜보다 그 옆의 충견과 시선이 마주친 게 아닐까. 눈치 없는 청년의 착각을 친절하게 정정해 주려던 알베르는 순간의 변덕에 입을 다물고 우아하게 웃었다. 그랬나. 모르는 사이 정이라도 들었던 모양이야. 미소로부터 어렵지 않게 거짓을 읽어낸 케일이 다시금 질색하는 얼굴을 해보였지만 알베르는 모르는 척 다 식은 홍차만 홀짝였다. 한 달간 지켜본 케일 헤니투스는 의외로 스스로의 일에 둔감한 면모가 있었으므로 제가 먼저 말을 꺼내지만 않으면 그런 줄 알겠지. 착각에 힘을 실어주고자 선심 쓰듯 나무 그늘의 최한에게로 시선을 옮긴 알베르가 평소와 다름없게 웃었다.

 

그는 이 기이한 경험이 제 삶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한때라 결론지었다. 즐거움이라곤 적의 뒤통수를 칠 때나 간간이 느껴온 삶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피치 못할 생명까지 도륙하며 이뤄낸 제 세계의 평화와는 달리 많은 것들이 온전한 세계를 관람하는 일도 썩 나쁘지 않았다. 본인이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국을 지키려 했을지언정 불필요한 희생이 달가웠던 건 아니었으니까. 같은 군주 아래 이토록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는 건 필시 그곳에 없는 변수 때문이었고, 그 변수는 지금 제 앞에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알베르의 시선이 다시금 케일에게로 가닿았다. 탐이 나는 인재. 소유하고 싶으나 결코 누군가의 손에 떨어지진 않을 자. 어려운 자리만을 탐해온 삶이 버릇처럼 새로운 대상을 향해 팔을 뻗었다.

 

“에르하벤님이 원인을 찾았다고 말씀하셨으니 조만간 돌아갈 수 있으실 겁니다.”

“고룡까지 부려먹다니. 자네 정말 유능한 인간이군”

“지겹고 진부한 칭찬 감사합니다.”

“겸손을 모르는군. 이럴 땐 보통 예의상으로라도 부정하지 않나.”

 

남이야. 퉁명스러운 대꾸에 불경죄를 논했으나 허울뿐이다. 알베르는 첫날의 체통은 어디로 갔느냐며 들으라는 듯 투덜거리는 소리 뒤로 굳이 대답을 이어붙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오랜만이었지만, 끊임없이 무언가를 쟁취하며 살아왔으니 이 정도의 평온은 사치라 부르기도 미안하지 않나. 설령 정말 그렇다고 해도, 누가 감히 한 나라의 왕세자에게 실례지만 시간을 낭비하는 중이냐고 물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놀고 있으셔도 됩니까.”

“나 없이도 돌아가는 국가를 연습할 때도 되었지.”

“시간에도 효율을 따지시는 분 아닙니까.”

“여태껏 초 단위로 나눠 썼으니 괜찮네.”

 

실례지만 연세가. 능청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오는 얼굴에 대고 차마 주먹까진 뻗지 못한 케일이 들으라는 듯 혀를 찼다. 대놓고 불경한 표정을 본 알베르가 제 생각을 정정했다. 이 정도 사람쯤 되어야 물어볼 배짱이 생기나. 혀끝에 남은 씁쓰레한 차향을 음미한 그가 맞은편의 사내를 훑었다. 흰 피부 위로 내려앉은 태양빛. 새빨간 머리카락 밑 그림자의 테두리가 옅다. 늘어진 한쪽 손, 까딱거리는 발끝. 왕세자라는 존재 앞에서도 예의를 차리기는커녕 반쯤 등받이 위에서 반쯤 기울어져 늘어진 몸이나 미미하게 따가운 햇볕 탓에 살짝 찌푸려진 얼굴까지. 방패 하나 믿고 이렇게까지 무방비한 건가. 또다시 충동이 인다. 전 국민이 영웅이라 칭송하는 존재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어 쥐고 흔드는 저열한 상상. 알베르 크로스만은 그런 사소한 감상 덕분에 스스로가 뒤틀렸음을 실감했다. 신의 안배마냥 잘 짜인 평화 속에서도 균열을 찾아 파고드는 습성. 비록 그 대상이 사람을 향한 것은 처음이었으나, 그는 이를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영영 가질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일시적인 탐욕, 혹은 까마득한 것일수록 갈망하게 되는 모든 인간의 천성 중 하나이겠거니. 케일 헤니투스가 알고 있는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보다 앳되고 순한 낯을 떠올린 알베르가 실없이 웃었다. 저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03

 

케일 헤니투스는 근래 가벼운 정신적 피로에 시달렸다 차라리 전쟁 직후 어지러운 정세를 바로잡고자 하루에 몇백 장의 서류를 처리하던 때가 나았, 던 건 아니지만. 확실히 그건 좀 너무했다. 약한 인간, 많이 피곤한가. 옆에서 애플파이를 들고 안절부절못하는 라온에게 애써 웃어 보인 그가 책상 위로 엎어졌다. 이대로 열두 시간만 잠들고 싶다. 그런 케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발톱으로 카펫 위를 긁어대던 온과 홍이 갑자기 귀를 쫑긋거렸다. 이거 알비 발소린데. 지금 여기로 오고 있는데. 그는 아이들 앞에서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쓰며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짜 맞춘 듯 벌컥 열린 문틈으로 갈색 머리의 훤칠한 미남이 들어섰다. 역시 왕세자 닮았는데! 엄청 비슷하게 생겼는데! 야옹거리는 아이들을 잘 달래 방 바깥으로 내보낸 그가 싫은 낯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이마를 짚었다.

 

“이번엔 뭡니까.”

“보고 싶어서.”

“당신 알베르 크로스만 아니지?”

“자네가 손수 알비라 소개하지 않았나.”

 

기껏 열심히 숨겼는데,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돌겠네. 저 입을 꿰매버릴 수도 없고. 건조하게 중얼거린 케일이 다소 과격한 상상을 지워내며 들고 있던 서류를 반절 건넸다. 일 없으면 밥값이나 하세요. 그에 군말 없이 탁자 위를 굴러다니는 만년필과 종이뭉치를 받아드는 모양새가 제법 자연스럽다. 그게 문제였다. 명백히 제 일상에 스며들길 청하는 행동거지. 이 세상에 속한 자도 아닌 주제에 주변을 얼쩡거리고, 어떻게든 이 하릴없는 삶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구는 이방인. 안 어울리게 왜 저러지. 짧은 기간 관찰한 다크엘프 알베르 크로스만은 제가 본래 알던 이보다 능청스럽고 제멋대로였으며, 적당히 속내를 읽을 순 있어도 그 저의까지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이와 불필요한 감정적 교류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 케일은 더더욱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 길이 없었다. 몇 번 이유를 물었더니 마음에 들어서, 따위의 돼먹잖은 대답이 돌아와 그마저도 관둔지가 벌써 일주일쯤 됐나. 언젠가는 사라질 사람에게 쏟을 시간에 내 새끼들이나 잘 보살펴야지. 손가락 위로 펜을 한 바퀴 돌린 그가 서류 위 활자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케일 헤니투스는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라는 전제가 되레 독이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몇 달 내로 사라질 사람 앞에서까지 혀에 기름칠할 필요는 없다는 안일한 생각이 그 시발점이었다. 한 번 그러고 나니 굳이 서로 피곤하게 굴어야하나. 귀찮다. 이 모든 게 ‘영웅의 탄생’이라는 책 속 이야기고 당신도 그중 일부라는 말만 지껄이지 않으면 상관없지 않나, 따위의 자기합리화까지는 금방이었다. 허튼 상념들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스스로가 검증된 이방인 앞에서 다소 해이해졌음을 인정했다. 왕세자라는 직함 아래 최소한으로 갖췄던 예의마저 내려놓자 김록수의 자아가 빈자리를 메웠다. 공자, 일 안 하나. 알아서 합니다. 팔을 휘적거리며 대꾸한 케일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여태까지 이십 대 후반의 백수생활을 위해 과로한 탓에 어디 한구석 스트레스를 풀 장소가 필요했고, 때마침 알맞은 대나무 숲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노라. 진짜 숲과는 달리 뚫린 입으로 헛소리를 지껄인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서류 처리가 가능하다는 장점으로 상쇄한다고 판단했을 때 몹시 나쁘지는 않았다. 복잡한 와중에도 서류 맨 아래 칸에 본인의 서명을 써넣은 케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러운 자아 성찰 시간은 이 정도면 됐다.

 

“거듭 말하지만, 자네는 참 탐나는 인재야.”

“저도 압니다.”

“겸손을 모르는 것도 여전하고.”

“아, 예.”

 

말 끝나셨으면 들고 있는 서류들 이리 주세요. 마저 확인해야 하니까. 심드렁한 낯빛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창가를 타고 밀려든 바람이 시원했을 뿐. 케일은 이 모든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귓가를 스치는 헛소리나 가벼운 언행은 그 세계의 알베르 크로스만을 지켜주는 얇은 막이었으리라. 이 세상의 나쁜 것들과는 도통 연고가 없어 보이는 삶을 위한 표면적인 포장. 날 때부터 손에 쥐어진 고귀한 혈통, 객관적으로 찬사를 받을 법한 얼굴,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유려한 말솜씨와 뛰어난 사업수완. 타인의 시선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결과물뿐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 하지만 다크엘프 알비가 되어서까지 저렇게 굴어야 하나. 그 편이 지금쯤 왕궁에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을 왕세자와 대비될 테니 제게는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돌아가면 자네 무덤이라도 파헤쳐볼까 싶어.”

“드래곤도 죽은 사람은 못 살립니다.”

“장담할 수 있나.”

 

아뇨. 단호한 대답에 어느새 제 뒤편까지 걸어와 어깨 위로 팔을 걸친 이방인이 귓전에 속삭였다. 공자는 이럴 때만 겸손해지는군. 단어에 대한 용례가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가벼운 접촉 탓에 책상 위로 떨어진 검은색 잉크가 나뭇결을 따라 천천히 퍼졌다. 이건 그냥 몸을 빼는 거지, 웬 겸손. 설령 진짜 그쪽의 케일 헤니투스를 살려낸다고 해도 내용물이 다르니 허튼짓에 불과하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그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피곤한 남자. 제 업보라는 생각에 또 쫓아내지는 못하겠고. 빌어먹을 영웅의 탄생. 어디 하나 제정신 박힌 등장인물이 없어. 이러다 어느 날 그쪽의 최한이 넘어와 내가 죽인 망나니가 살아있다니, 다시 죽어라 하고 목을 베는 건 아닌가.

 

“이곳의 자네를 죽이면 저쪽에서 깨어날 수도 있잖나.”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십니다.”

“조금만 덜 유능했으면 좋았을걸.”

“그럼 데려갈 필요가 없잖아. 모순입니다.”

 

방금은 어투가 조금 불경했어. 많이 심심하십니까. 저기 고양이들이 환영해줄 텐데. 턱짓으로 문 바깥을 가리켰다. 노골적인 축객령에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뻔뻔하게 웃는 다크엘프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혹시 저 좋아하십니까? 그럼. 자네는 왕국을 넘어선 대륙의 영웅 아닌가. 남자라면 한 번쯤 꿈꿔봤을 이상향이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말로 귀찮고 피곤하며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내. 이어질 말은 듣지 않고도 예측할 수 있었다.

 

“자네가 조금만 더 겸손했다면 좋았을 텐데.”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움직이던 펜이 멎었다. 순간 자신이 말한 줄 알았으나 알베르의 목소리였다. 마주한 시선이 깊어졌다. 영양가 없는 말을 지껄이다가도 순식간에 포식자처럼 구는 것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록수는 이런 부류를 잘 안다. 대다수가 눈앞의 맹수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눈을 감을 때 그는 비슷한 족속들을 찢어발기며 살아왔으므로. 그렇기에 청년은 이번에도 이방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결국 겸손 운운 하실 것 아닙니까. 목 언저리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묵묵하게 빛 하나 들지 않는 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눈앞의 알베르 크로스만은 바깥의 사람이다. 김록수의 세계에도, 케일 헤니투스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회색 지대의 방랑자. 겸손이라는 얄팍한 경계를 두고 어떻게든 감정을 욱여넣는 광경조차 저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그것이 설령 자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을지언정,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감정들은 알아채지 못했다는 변명 하에 어떤 방식으로든 덮어버릴 수 있었으므로.

 

 

04

 

“돌려보낼 방법을 찾았답니다.”

“언제쯤 떠날 수 있나.”

“일주일? 그보다 빠를 수도 있고요.”

 

예정된 이별통보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대화처럼 흘렀다. 잔을 반쯤 채운 적포도주를 기울인 알베르 크로스만이 제 뾰족한 귀 끝을 어루만졌다. 여길 떠나면 언제쯤 이 모습으로 다시 살아보겠나.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미련이라는 것처럼. 짐짓 슬픈 낯을 꾸며내는 모습에 적당히 매끄러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동조하는 케일은 누가 봐도 완벽한 친우의 모습이었다.

 

“자네의 거짓부렁마저 그리울지도 몰라.”

“그것 참 영광입니다.”

“여전히 겸손을 모르는 자세도.”

 

겸손 운운하는 게 최소한의 방어선이라는 케일 헤니투스의 이론을 증명하듯 알베르는 내내 툭하면 자네가 조금이나마 겸손했다면, 따위의 말을 지껄였다. 헤어지기 며칠 전이라고 변하는 건 없었다. 문득 그 말을 듣자마자 케일님께서는 누구보다 겸손한 분이시라며 성을 내던 최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돌아가게 되면 소드마스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것 같아. 웃음기 섞인 뜬금없는 말에도 케일은 대충 긍정했다. 지나치게 안온하고 단조로운 작별. 알베르는 어느 날부터 이 모든 익숙함이 사라지기를 고대했다. 그리하여 눈앞의 남자에 대한 욕망이 해소되지 못하고 자신을 괴롭혀주기를. 무료한 시간 속에서 의도치 않게 스스로에 대해 고찰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살아갈수록 무거워지는 삶을 옭아매기 위해 끊임없이 바쁘게 굴었던 과거, 제대로 된 친인척 하나 없는 왕세자에게 따라붙던 악의적인 시선. 으레 감내해야 할 고통은 아니었기에 권력을 쥐길 택했었던 어린 자신. 발밑에 적의 목이 쌓일수록 불필요한 언어는 잦아들었다. 뺨이라도 칠 기세로 비꼬던 목소리들이 경탄과 경배로 변모했다. 이윽고 왕좌를 손에 넣었을 때 느꼈던 환희. 이제는 다 바래버린 그 찬연한 순간들.

 

알베르는 유리잔을 꽉 쥐었다. 순수한 악력으로 조각난 파편들이 파열음과 함께 식기와 테이블 위로 우수수 떨어지며 자잘한 소음을 남겼다. 문 바깥에서 무슨 일이냐며 웅성거리는 사용인들에게 들어오지 말라 명한 케일 헤니투스가 잘 개인 흰 천을 쥐고 대단한 호의라도 베풀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반항깁니까. 흘러내리는 피를 손수 닦아줄 정도의 호감은 있다 생각해도 되겠나. 인간으로서 베푸는 최소한의 도립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케일의 뺨을 감쌌다. 좋아한다고 해주면 어디 덧나나. 귀찮게 굴지 마십쇼. 툭 하고 팔을 쳐낸 그가 자리를 떠나려 뒤를 돌았을 때, 알베르는 곡선을 그리며 팔랑인 옷자락을 무의식적으로 잡아챘다.

 

“케일 공자.”

“예.”

“……아닐세.”

 

제자리로 돌아간 케일 헤니투스와 알베르 크로스만이 다시 서로를 대면했다. 알베르는 바스러진 파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누구도 잔이었던 유리조각들을 더러 본연의 이름으로 부르지 못할 것이다. 바닥 어딘가를 뒹구는 부스러기나, 손바닥 어디쯤 꽂혀있을지 모를 잔재가 어떤 균열을 만들어낼 것을 알기에.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끊임없이 도륙당한 제 감정 또한 같다. 고작 몇 달간 간헐적으로 바랐던 형체 모를 저릿함이나 결말을 알았던 갈망. 활자 단위로 해체된 가벼운 일탈이 머릿속을 유영했다. 허물어진 방어선 위로 유약한 언어를 쌓아올린 알베르가 온화하게 웃었다. 자네가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어떻게든 데려갔을 거야. 대답을 바라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평소처럼 흘리듯 지나치겠지. 여전히 오만방자하고 불경한 태도로, 그런 건 제 알바가 아니라는 듯. 그러나 나른한 눈매가 휘어지며 영 맞물리지 않는 말들이 이어졌다.

 

“로운 제국을 만들까 합니다.”

“뜬금없이.”

“누구를 차기 교황으로 세울지도 고민 중이고.”

“종교에도 관심이 있나.”

“이러다 헤니투스 공작가가 될지도 모르죠.”

 

아무렇게나 연결되는 말들. 알베르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자네는 가끔 예측을 빗나가. 쿠키 하나를 집어든 알베르가 나무라듯 다시 한 번 겸손을 논하려 했으나, 그보다는 케일이 빨랐다. 잔을 내려놓은 그가 말을 덧붙였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내로부터 옅은 지배자의 향취가 풍겼다.

 

“저는 이렇게 지껄여도 괜찮습니다.”

“왜?”

“그럴 수 있으니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겸손하게 살고 있으니 제발 그 겸손 타령 좀 치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성가시다는 낯으로 휘 손을 내젓는 케일 앞에서 알베르는 소리 내 웃었다. 상대는 결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미 까닭을 알아서일까. 어쩌면 아주 빗나간 추측은 아닐 터. 모든 머리싸움은 무의미했다. 찰나,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올린 것들을 내팽개치고 이곳에 남고 싶단 생각이 든다. 생명을 욕망해본 적 없는 이가 호기심을 가졌을 때부터 정해진 수순처럼. 그러므로 알베르는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순전히 내뱉고 싶었던 까닭에 입술을 열었다.

 

“케일 공자.”

“말씀하세요.”

“사랑해.”

 

설령 이것이 사랑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일시적인 충동일지라도. 혹은 그저 제 세계에 없는 유능한 인재에 대한 흥미와 소유욕일지언정.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기적임을 알기에 가볍게 내뱉는 말. 며칠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갈 이방인들의 시선이 맞물렸다. 그 순간, 알베르 크로스만은 결코 이루지 못할 최초의 목표로부터 얻을 상실감을 기대했다. 억지로 정돈된 난잡한 감정.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든 것들. 이것이 아마도 제가 바랐던 결말이므로, 알베르 크로스만은 최초이자 최후의 황홀한 행복을 목구멍 너머로 집어삼켰다.

 

 

05

 

명백히,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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