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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한은 연기를 못 한다.

그것도 더럽게 못 한다.

 

최한은 그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따르는 케일이 시켰던 명령-마탑을 부쉈을 때의 이야기였다.-도 제대로 행하지 못했으며, 또 케일이 그에게 연기를 하지 말라는 말까지 했으니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난 연기는 쥐약이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한은 연기를 해야만 했다. 이유는 터무니없었다.

 

“최한. 뭐해?”

 

저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 이에게 들켜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케일은 눈치가 좋다.

그것도 굉장히 좋다.

 

스스로 그렇게 자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케일은 골치를 썩고 있었다. 자신의 뒤에서 따라오는 따끔거리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케일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저 어린-실제 나이는 알 수 없지만-소년의 마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뭘 어떻게, 받아줄 수도 없고.’

 

저 어린 애를 어떻게 받아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일은, 저 순한 얼굴만 보면 마음이 여려졌으므로. 뒤에서 따라오는 이를 바라보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뭘 그렇게 멀리서 걸어? 가까이 와.”

 

쭈뼛거리던 최한이 한 걸음 성큼 다가와 바로 뒤에 멈추었다. 케일은 자신의 바로 뒤에서 쫓아오던, 처음 만났던 순간의 최한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은 최한도 마찬가지였다.

 

2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이던 그 붉은 머리카락을 기억한다. 홀로 남았던 그 곳에 깊게 내려앉았던 어둠도, 그리고 간신히 손에 넣었던 가족들과 그 흔적을 모조리 불태웠던 불길과 낭자하던 혈흔의 붉은 색도 치가 떨리게 싫었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서 술기운을 풍기는 붉은 머리의 사내를 보았을 때는 당장에라도 치워버리고 싶어야 마땅했음에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에 홀린 사람처럼 그렇게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친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시선만이 움직였다. 그가 자신에게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웅웅 울려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소리, 유난히 크게 들리는 고양이의 야옹거리는 울음소리,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술 냄새, 붉은 머리카락, 욱신거리는 발목, 회색의 고양이와 붉은 색의, 또 그 망할 붉은 색을 가진 고양이, 저 멀리에 있을 경비병의 기척, 고양이의 상처에서 나는 붉은 피, 다시 붉은 머리카락,

 

“또 배는 안 고프고?”

 

그제야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덤덤하고 고요한 목소리. 자신에겐 닿지 않는 시선도 타오르는 불길처럼 붉을까. 보이는 것은 고양이의 시선뿐이었다. 사내를 당장에라도 베어버리고 싶어 하는 최한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한.

 

“대답 안 할 건가?”

“...배고파.”

 

대답은 홀린 것처럼 나왔다. 자신의 꼴이 어떤지, 최한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경비병에게 잡혀 쫓겨나기도 했으니까. 그런 이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이라니, 최한은 어색하기만 했다. 마치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맞이해주었던, 이제는 만나지 못할 그 사람들을 생각하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상대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다가왔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보지 못 한 것 같아서.

 

“야.”

“따라와. 밥 줄게.”

 

곧 경비병이 올 시간이었다. 그의 눈은 생각보다 붉지 않아 최한은 남몰래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목이 아팠음을 다시 한 번 상기했으나, 상관은 없었다.

 

작은 고양이에게도 다정한, 약한 사람.

붉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한 손으로도 비틀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약한 사람.

그러므로 이 사람은 내게 위협을 주지 못할 것이다. 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한 번에 죽여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안심해도 괜찮겠지. 하루 정도는 마음을 놓고 쉬어도 되겠지. 그 뒤에 은혜를 갚고, 복수하기 위해 떠나면 될 일이었다.

 

최한의 검은 죽이는 검이 아니라 지키는 검이 되었고, 당장에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릴 수도 있었던 이는 평생을 걸쳐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할 일만 끝나면 떠나려던 그 곳은 최한의 돌아갈 곳이 되었다. 한 끼의 식사와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침실을 얻은 대가로 은혜를 갚으려고 했던 것이 이제는 너무 불어나 영원히 갚지 못할 것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동경이다. 자신은 절대 따라잡지 못할, 그리고 감히 따라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빛에 대한 동경. 한 때 모든 것을 불태울 불길처럼 보였던 그것은, 최한이 나아갈 길을 점지해주는 등불이자 새벽을 비추는 태양이 되어 있었다.

 

언제든지 손 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한 때뿐인 같잖은 교만이었다.

 

3

케일은 그늘 아래에 앉아 눈앞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늑대족의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최한의 모습을 바라보던 케일은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오.. 얼굴에 비해 꽤,’

 

몸이 좋았다. 근육이 잘 잡힌 것이 자신의 몸과는 확실히 비교가 되지 않는가. 케일 헤니투스의 몸은 김록수가 들어온 직후부터 근육이 쭉쭉 빠져나가기 시작했는데.

 

“인간. 왜 그런 얼굴이냐?”

 

내가 뭐. 자신의 허벅지에 턱을 괴고 있는 어린 용을 툭툭 쓰다듬고는 다시 훈련시키는 모습을 감상했다. 최근의 최한은 케일이 볼 때 확실히 이상했다. 가끔 멍하니 있다가, 자신을 향해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안절부절 못할 때도 있었으며, 가까이에서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케일은 그것을, 어린 풋사랑이라고 판단하였다. 으레 처음 사랑에 빠진 이들이 서툴게 그 마음을 키우듯, 최한이 딱 그 모양새였다. 정말 자신이 그의 첫사랑일까 생각해보면, 분명 한국에서의 17년 외에도 오랜 세월을 지냈을 녀석이 첫사랑조차 없었을까 싶어 안쓰러워지지만, 하여튼 저 녀석은,

 

아, 눈이 마주쳤다.

 

케일은 자신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 탓에 미끄러질 뻔한 용이 왜 그러냐면서 투덜거리는 것조차 듣지 못했다. 최한은, 그러니까, 눈이 마주칠 줄 몰랐다는 듯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시선을 움직이다가 민망하다는 듯 자신을 마주하며 웃어버렸다.

그 웃음이 눈에 박혀 케일은 눈이 시렸다. 어색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자, 그제야 다시 훈련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케일은 자신의 눈을 한 번 문질렀고,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웃는 얼굴을 곱씹으며 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최한. 진짜 연기 못하네.”

 

모른 척 해주려고 했는데, 최한이 너무 서툴렀다. 케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 얼굴이 빨갛다! 왜 그러나?”

 

잠깐 밖에 나와 앉았다고 감기라도 걸린건가? 정말이지, 인간, 넌 너무 약하다! 조잘조잘 떠드는 용을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빨개지긴 무슨. 여섯 살의 용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4

최근 케일님이 이상하다.

가장 먼저 눈치를 챈 것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계속 멍하니 있는데!”

“한숨만 쉬는데!”

“혹시 약한 인간, 아픈건가?”

 

인간은 너무 약해서 큰일이다, 최한! 완전 큰일인데! 아프면 안 되는데!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말을 정리해보자면, 그러니까, 케일님이 요즘 멍하니 있을 때가 많고 한숨을 쉴 때도 많다는 소리였다. 심각해진 최한의 옆에서, 로잘린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꼭 상사병같네.”

 

웃으며 말했던 로잘린의 웃음이 뚝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그러니까, 음, 상사병이란...

로잘린은 최한을 흘긋 바라보았다.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로잘린이 상상한 모습은 아니었다. 상상했던 것은 좀 더 우울해하는 최한이었는데.

 

“상사병이 뭐냐, 인간?”

“뭐냐는데!”

“큰 병이냐는데!”

 

아이들의 말에 로잘린이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이 걸리는 병인데 죽는 병은 아니고-이 쯤에서, 죽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로잘린은 아이들에게 할 말은 골라서 하는 상식인이었다.-위험한 병도 아니지만 계속 한 사람만 생각나게 되는 병이라고. 그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최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케일님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호위하는 사람으로서 몰랐다는 것이 속상했다. 하지만 케일님이 최근에 만난 사람이 얼마나 되던가. 그러니까 로잘린-까지 생각하며 로잘린을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로잘린이 어째선지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도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고래족의 위티라 또한 그랬다. 아니면 혹시, 왕세자?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 정도인데.

 

‘나한텐 말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최한이 시무룩해지는 부분은 그 부분이었다. 그래도 자신은 케일님의 첫 여정부터 함께 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비록 기저귀도 자신이 갈았다며 케일님을 우리 강아지도련님이라 부르던 론에 비하면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케일님이 가장 믿어주는 부하는 나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생각해?”

 

로잘린의 질문에 최한은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최한은 숨기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리고 로잘린은 웃어버렸다. 아까와는 달리 꽤나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 얘는 아직 멀었다.

 

5

“공자,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케일은 사레가 들려 마시고 있던 레몬차를 뱉어내는 대신, 다행스럽게도 기침 두어 번으로 끝을 낼 수 있었다. 그 옆에서 론이 이런, 하는 짧은 추임새와 함께 손수건을 내밀었다. 젠장. 기껏 만들어줬는데 제대로 마시지도 않는다고 슥삭 당하는거 아냐? 그런 되도 않는 생각을 하며 입가를 닦아내었으나 여전히 목이 아렸다.

 

“뜬금없네요. 갑자기 연애 이야기에 꽂혔답니까?”

 

아까 애들도 물어보던데요. 그 퉁명스러운 말에 로잘린은 웃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라온과 온, 홍이 그에게 와서 떠드는 것을 상상한 탓이었다.

 

“아이들이 걱정이 많아요. 큰 병에 걸린거 아니냐고. 최한도 그렇고.”

 

최한. 그 단어에서 케일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로잘린은 확실하게 보았다. 로잘린의 눈이 가느다랗게 접혔다.

 

“아이들이 말하는 증상이 꼭 상사병같아서.”

 

누나라고 생각하고 말해보지 그래요? 그렇게 말해오는 것에, 케일은 여전히 칼칼한 목을 가다듬으며 즐거워 보이는 그녀를 흘긋 바라보았다. 로잘린씨가 나이가 어떻게 되더라. 동생이 나랑 동갑인건 기억을 하는데. 원래 나이불문 남의 이야기는 즐거운 거라지만. 분명히 자신보다 어릴 이에게 누나라고 생각하라는 말을 들은, 케일 안의 김록수는 질색하려는 표정을 감추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최한이 많이 시무룩해하던데요. 자기는 모르고 있었다고.”

 

응? 케일은 다시 집어들던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 눈에 의문이 서렸다. 모르고 있었다는 부분에? 그러니까..

 

“질투라던가?”

“케일님하고 가장 가까이 있었는데 몰랐다고 자책은 하던걸요.”

 

잔뜩 흩트려 놓았던 퍼즐들이 조각을 맞추는 기분이었다. 아, 설마, 그럼 나는.

 

“젠장.”

“...공자. 얼굴이 빨갛게 되었는데요.”

 

못 본 걸로 하세요. 그리 말하며 케일이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가렸다. 미친거 아니냐. 케일 헤니투스. 미쳤냐. 김록수. 홀로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는 케일의 바람과는 달리, 로잘린의 눈에는 확실하게 들어와 버렸다. 머리카락만큼 붉었던 그 얼굴이.

 

‘세상에. 이거 너무 재밌네.’

 

로잘린의 시선이, 케일의 옆에 서있던 론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론은 결국 이번만큼은 강아지 도련님이 아닌 로잘린의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일단 지켜보자.’

 

6

케일은 고뇌에 빠졌다.

 

첫 번째 고뇌. 최한은 케일을 사랑하는가?

내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시선, 눈도 마주치지 못 하던 그 얼굴, 환하게 지어주던 미소. 그것들은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나? 숨기던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나?

두 번째 고뇌. 최한의 감정은 무엇인가?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가까이 있었는데 몰랐다고 말한 것이 사랑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감정이었지? 동경? 주인공이 나를? 그럼, 그에게 있어서 나는 무엇인가?

세 번째 고뇌. 케일 헤니투스는 왜 고뇌하는가?

애초에 그의 사랑은 사그라들 때까지 외면할 속셈이지 않았나? 사랑이 아니었다면 안도해야 하는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고뇌에 빠져 있는가.

 

인간! 얼굴이 빨갛다!

상사병이라는데!

계속 한 사람만 생각한다던데!

죽는건 아니라던데!

공자. 얼굴이 빨갛게 되었는데요.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고대의 힘들이 소란할 때도 이렇게 심란한 기분은 아니었는데.

 

케일은 결론을 내렸다.

우스운 교만에 빠져 있었음을 인정했다.

 

7

“최한. 좋아하는 사람 있나?”

 

예? 최한이 얼빠지게 되물었다. 가끔, 정말 예상도 못한 질문을 들을 적마다 하는 되물음이었다. 케일은 순한 얼굴이 넋을 놓았다가 점점 당혹감에 붉어지는 것을 평소처럼 나른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얼씨구. 말도 더듬거린다. 귀여워 죽겠네. 아니,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이미 글렀다. 씰룩거리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눌러 내렸다. 창 밖에서 라온과 온, 홍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이 위까지 들려왔다.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물었는데.”

 

최한은 고민했다. 혹시, 케일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셨는데 나한테 상담을 하시려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최한은 힘껏 용기내어 물었다. 그러는 케일님께서는,

 

“그.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 있나요?”

 

최한은 목이 바싹 타는 것을 느끼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이 왜 그런 반응인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최한의 질문을 받은 케일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내가 졌다, 졌어.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케일이 입을 열었다.

 

“있어.”

“아, 역시..”

 

있으셨구나. 로잘린과 이야기한 이후로 알고 있었으며, 케일이 직접 이야기해주는 것은 처음이니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입 안이 썼다. 진짜 있으셨구나. 좋아하는 사람. 어떤 분일까.

 

“어떤 사람이냐면,”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고 내가 입 밖으로 꺼냈던가. 최한이 얼떨떨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케일은 그런 그의 모습에 한 번 씩 웃고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그 박자에 맞추듯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불의는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사람이고.”

 

케일님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네요. 최한은 생각했다. 그의 옆을 걸을 사람이라면 저 정도는 당연하다고.

 

“굉장히 강한 사람이기도 하고.”

 

케일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므로. 하지만 저도 당신을 지킬 수 있는걸요. 저만으로는 안 되는 건가요?

 

“그런데 엄청 착하기까지 하고.”

 

아. 최한은 기분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분명 자신의 태양이 눈앞에 있음에도 어둠의 숲에 홀로 있을 때처럼 외로웠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이길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내가 왜 이기려고 들었지?

케일은 점점 암울해지는 최한의 얼굴이 조금 우스웠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이는 사랑이 아니었고, 결국 자신만이 사랑을 운운하고 있는 이 꼴이 우습다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눈치도 없고.”

“연기도 더럽게 못하고.”

 

최한의 얼굴에 의문이 서리는 것을 보고 케일은 결국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저 녀석은 분명 지금쯤 생각하고 있을 거다. 나 말고도 주변에 연기를 못하는 사람이 누가 있더라? 하는 그런 생각을.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고.”

“소드마스터야.”

 

최한은 말이 없었다. 케일은 최한이 눈치가 없는 이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멍청한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한참 멍하니 케일을 바라보던 최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것에는 깨달은 진실에 대한 부끄러움과 이유를 알 수 없는-자신이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질투하고 있던 가상의 상대에 대한-승리감이 섞여 있었다.

 

“그, 케일님, 그, 제가,”

“약한 인간! 간식 시간이다!”

“오늘 간식은 푸딩이라는데!”

“빨리 나와야 같이 가는데!”

 

최한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다, 가. 케일이 가볍게 투덜거리며 최한을 스쳐지나갔다.

 

“뭐해? 최한.”

“예?”

 

그냥 이렇게 가시냐는 듯한 표정으로 최한이 케일을 바라보았다. 참나, 왜 저렇게 버려진 표정을 짓는 건지 모르겠다. 네가 날 사랑할거란 생각에 배신당한 것은 나였는데. 케일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까닥였다.

 

“이야기는 밤에 마저 하고.”

 

내 침실에서. 덧붙인 말에 최한의 얼굴이 더욱 불타오를 듯이 달아오른다.

 

“침실, 그, 둘이서요?”

“그래. 문제 있나?”

 

최한이 고개를 황급하게 내저었다. 이게 뭐 이렇게 부끄러운 일인지. 최한은 자신의 뺨을 한 번 문지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케일은 만족한 듯 말했다. 가자.

케일이 먼저 문을 열자, 최한이 그 뒤를 따랐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걸음을 옮기던 케일이 다시 고개를 돌려 최한을 바라보았다. 못마땅하다는 기색이었다.

 

“옆으로 와.”

 

옆에서 걸어. 케일의 말에, 뒤를 따르던 최한이 붉어진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 어느 날의 오후, 케일을 홀렸던 미소였다.

 

“네, 케일님!”

 

최한이 성큼 다가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케일의 옆자리에 섰다. 언젠가 누군가가 자리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 옆자리에 자신이 서게 된 것이 마냥 어색했던 모양인지, 최한은 우물쭈물거리며 어쩔 줄 몰라했으나 케일은 당장의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뒤에서 걷는 것보다는 훨씬 낫네.’

 

적어도 찌르는 듯한 시선은 없으니 다행 아닌가. 케일의 보폭에 맞추느라 최한의 걸음이 조금 버벅였으나 곧 두 사람의 걸음이 엇비슷하게 맞춰졌다. 지금까지 불편하던 것은 최한의 순진한 마음을 외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앞으로는 옆에서 걸어.”

“네? 그,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간식이 있는 곳으로 함께 걸음을 옮겼다. 폭탄을 던져놓고 홀로 마음이 후련해진 케일과는 달리, 폭탄을 떠맡은 최한은 그 날 내내 긴장을 놓지 못했지만.

 

그 날 저녁, 로잘린은 처음으로 최한의 연애 상담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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